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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월 Nov 23. 2022

진실을 깨우치는 베이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글을 읽기 전에 재생해야 할 배경음악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소견:

이 영화는 ‘멀티버스‘, ‘버스 점프’, ‘다른 차원의 나’처럼 복잡하고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룬다. 그렇지만 에에올(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영화 테넷 같은 놀란의 의도가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고 수차례 다시 돌려봐야 하는 sf 영화가 아닌 생각보다도 단순하고 원초적인 의도를 갖고 있어 보인다. 그게 무엇인가? 결국 삶은 다정함과 작은 것들의 행복 그리고 사랑으로 이뤄진 것이 아닌가 싶다.


뒤죽박죽 두서없고 글솜씨 없는 나의 주 3가지 포인트 감상평


1. 기성세대


태어나 유아기 발달 때 처음 배우는 것은 사랑이다. 정확히는 인간은 사랑을 받는 것을 먼저 배운다. 그 배움의 과정이 정서를 빚는다. 유아기의 정서가 곧 그 사람의 사회정서로 자리 잡곤 한다. 이 영화는 주인공인 에블린과 그녀의 딸인 조이의 관계에 초첨을 둔다. (그녀의 딸 이름이 조이 Joy라는 점도 에블린이 그녀의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


조이는 흔히 요즘 국가 불문 MZ세대가 느끼는 삶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격변하는 세상 속의 본인의 취향을 찾고자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극 중 공공 (에블린父)은 보수적인 아버지이다. 자식의 성공에 대한 기준치가 확고한 보편적인 7-90년대 아버지이며, 에블린은 그런 아버지 아래 자란 덕에 어떤 정서를 갖고 있을지 얼핏 짐작할 수 있다.


그때의 “시절”이 무색하게 급변한 세대에 살아가는 조이는 본인의 성 정체성과 같은 자아실현에 인정 욕구가 커 보인다. 이를 보란 듯이 에블린이 조이의 인정 욕구를 저버림과 동시에 모녀 사이에 균열을 만든다.


영화 후반에서 에블린은 비로소 자신의 아버지인 공공에게 확고한 반기를 들어 당당히 조이의 여자 친구를 소개해준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조이에게 다가가 “nothing matters”라는 말과 함께 딸을 따듯하게 안아준다. 조이의 “Nothing Matters.”라는 말과의 상반되는 온도로 모든 걸 내려놓고자 했던 조이의 냉정을 온정으로 따듯이 녹여준다.


2. 고급 유머


전반적인 영화의 흐름은 매우 엽기적이고 뒤죽박죽 복잡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장면, 음향, 그리고 미장센에 심혈을 기울인 티가 곳곳 묻어난다. 모든 것을 올려놓은 베이글이라, 왜 굳이 베이글일까? 가장 친숙하고도 무해하다는 도식 때문이다. 이를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악하고 두려운 아이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나는 이 영화의 일종에 유머라 생각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데, 점화 효과(Priming Effect: 시간적으로 먼저 제시된 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의 처리에 부정적 혹은 긍정적 영향을 주는 현상)를 이용하여 일종의 쾌감도 주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영화 극초 반부 내내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도 목소리 내어 말 못 하는 나약한 남편, 에이먼드가 찹스틱을 먹고 성룡같이 변했을 때, 우리에게 일종의 쾌감을 안겨준다. 개인적으론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다른 차원에 나는 또 어떤 걸 잘할 수 있을까란 무안한 상상도 안겨줬다. 나는 영화 초반을 보며 에이먼드는 영화 내내 주인공인 에블린의 슈퍼파워에 의존을 할 무능력한 캐릭터일 거라는 점화가 있었다. 영화는 보란 듯이 다른 차원의 에이먼드를 통해 내가 그린 클리세적인 그림을 뒤엎었다.


나는 가끔 다음 생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냐는 질문에 바위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바위는 움직임도 감정도 생각도 없이 그냥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생각이 너무 많고 머리가 복잡할 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코로나처럼 퍼질 때, 나는 항상 내가 그냥 바위라면 어떨까라는 막연한 상상을 한다. 이를 보란 듯이 영화에서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돌이라면에 관한 장면을 보여준다. ‘역시 나 같은 생각은 나만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이상한 안도를 했다. 이것도 이 영화만의 일종의 유머 같았다.


3. 우울함 극복기


우리는 삶을 살며 실수를 한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클수록 우리는 실수를 겁낸다. 그렇지만 이 세상 아무리 큰 실수라 해도 이 광활한 우주에 티끌 같은 존재인 내가 그 실수로 인해 얼마나 큰 판도를 바꾸겠는가. 나는 그런 생각에 휩싸이면 겸손한 마음보다 무기력한 마음이 먼저 찾아온다. 앞서 말한 “Nothing Matters”처럼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일시적인 생명일 뿐이고, 우주에 티끌도 안 되는 존재이기에 나라는 존재는 별것도 아닐 수 있다. 이런 생각에 갇히면 정말 쉽게 "아무것도 상관없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는 멀티버스라는 광활한 공간에서 우리는 수많은 존재중 하나일 뿐이란 생각도 들게 한다. 그가 주는 상실감과 박탈감은 인간이라면 한 번쯤은 마주한 적이 있는 우울함의 부수적인 감정이라 생각한다.


다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티끌 같은 우리의 삶엔 때론 공허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의 다정함을 잃으면 안 된 다는 것이다. 극 중 에블린은 우리의 삶은 짧고 티끌 같기에 그러므로 더 다정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정함을 통해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온기는 비로소 얼어붙은 감각들을 되살린다. 감각들이 살아나면 일상의 사사로움도 행복이 될 수 있다. 삶에 무기력함과 우울함이 굳은살처럼 자리매김을 하려고 할 때, 우리는 보드라운 우리의 살갗을 잃지 않으며 따스하고 폭신한 손으로 서로를 다독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정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정함을 통해 우리는 우리들만의 온기를 찾고, 이를 통해 서로를 애정 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로소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한없는 다정함과 친절함은 가라앉은 슬픔 위에 떠 있는 돛배와 같아서
그 안에 타 있는 이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침몰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경고를 주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직한 슬픔은 파도를 만들지 못하는 잔잔하고 깊은 저수지 같았다.

‘우주를 날아가는 새'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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