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화분 한 개가 있다.
한 번은 봄이 왔겠다, 기분도 전환할 겸 작업물에 사용하기 위해 허브 모종 5개를 주문했다. 3년째 잘 키우고 있고, 새로 들어올 친구들도 창가에 두고 키우면 충분하겠지 싶은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의 나에겐 아주 작은 성취감이라도 필요했으므로. 큰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지 않으면서 성장에 일조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대상으로 딱이었다. 화분과 흙까지 구매하고, 분갈이를 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택배를 기다렸다.
이틀 뒤쯤 모종이 도착했고, 바닥 한편에 어딘가에서 얻어온 신문지를 깔아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 양손엔 목장갑을 끼고, 모종삽을 대신할 플라스틱 숟가락을 손에 쥐고 신나는 노래를 틀었다. 최대한 뿌리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흙을 털어내고 미리 준비한 화분에 옮겨 살포시 눌러 담았다. 예상처럼 순조로웠다. 마지막 모종에서 왕 지렁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몰래 온 손님이 있는 것도 모르고 콧노래를 부르다 그를 마주한 순간, 화장실 문 앞까지 달려 나갔다.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줌을 최대한 당겨 존재를 굳이 다시 확인했다. ‘방금 본 게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나는 다리가 많거나, 없는 존재들을 무서워한다. 지렁이보다 수백 배, 수천 배는 더 크고 위협적인 존재면서. 잠시 동안 식은땀을 흘렸지만 비교적 손쉽게 해결됐다. (발발거리며 모종을 비닐봉지에 담아 옥상 주인집이 키우는 화분에 거의 투척하듯 올려두니 알아서 옮겨갔다. 손에 낄 수 있는 장갑이란 장갑은 다 끼고 계단을 올라갔었다.)
로즈마리. 타임. 바질. 애플민트. 레몬밤.
그중 한 모종에 거미줄 같은 실이 붙어있었다. 아무렴, 큰 문제는 아니야. 하고 넘겨버렸다. '겨우' 한 가닥의 실은 옆 화분까지 번져 제법 큰 실타래를 만들었고 결국 모두 죽(이)고 말았다. 모종을 들인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데 허브의 상태가 갈수록 아리송했다. 잎이 점점 옅어지고 노래지고 있었다. 과습한 상태일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내 특징 중 하나는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매일 주던 물을 2주에 한 번꼴로 주기 시작했다. 그중 꽤나 오래 살아있던 로즈마리마저 앙상해지니, 그제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붉고 작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진드기였다. 너희가 다 먹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 친구들이 말라가고 있는 거구나. 뒤늦게 탓을 하며.
분갈이를 할 때 잎이 성한 지 조금 더 면밀히 살폈더라면. 아니, 모종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을 하긴 했던가? 나에겐 그런 습관이 없다. 오죽하면 새로 산 옷 겨드랑이에 구멍이 있던 것도 모르고 거리를 활보한다. 한두 번이 아니다. 구멍 난 옷은 주로 동생이 수선해 준다. 어느덧 독립한 지 6년 차, 옷장 속에 구멍이 난 채로 방치되어 있는 티셔츠 하나가 있는데 언젠가 놀러 온 동생이 답답해하며 고쳐주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다.
항상 마음이 앞서는 나는, 그저 물을 잘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문제였다. 잘 주는 게 어려웠다. 나에게 잘 주는 건 많이 준다와 비슷한 개념이었고, 과습한 흙은 진드기에게 최적의 환경이었을 것이다. 모르면 검색이라도 했어야지. 식물 키우는 게 얼마나 어렵겠냐는 자만함 덕분이었다.
화분 중 3개는 썩어버렸다. 내 눈엔 왜 그렇게 흙이 말라 보였는지.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길 바라며 마음(을 담은 물)을 담뿍 주었는데. 넘치게 주는 것도 해롭구나. 생을 달리 한 화분을 모두 처리하고 나서야 일방적인 폭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줄걸. 적당한 정도를 모르면서. 식물을 들이고 보내며 나를 돌아본다.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건 본인이라는데, 왜 살아갈수록 더 모르겠는지. 알고자 하는 게 욕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년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식물과 함께 하는 포근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 무턱대고 데려오는 실수를 또 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다. 문제라면 바보 소리를 자주 듣는다는 거겠지만.
우리 집에는 화분 한 개가 있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오던 날, 기념으로 집 근처 이마트에서 데려온 친구이다. 잊혀질 때쯤 한 번씩 물을 주고 3년이란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동거인을 탓하지 않고 알아서 잘 지내는 홍콩야자가 다음 집에서도 나와 함께해 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