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네버엔딩 투잡.
51화. 네버엔딩 투잡.
물류에 적응을 해나갈 무렵, 나는 작가 공모에 많이 선정되어서 작품을 많이 해야 했다. 코엑스에서 열릴 부스 개인전을 채워 넣을 그림들도 준비를 해야 했고 일본 개인전을 할 작품들도 준비를 해야 했다. 일본에서 할 개인전이 계획되어 있던 갤러리는 신주쿠에 위치해 있었는데 갤러리가 다소 협소했기 때문에 소품을 위주로 준비를 해야 했다. 작품을 우편으로 보내야 하는 일도 작품을 소품으로 해야 할 이유가 됐다. 반면, 부스 개인전에 걸 그림들은 대부분 100호와 50호 작품들로 준비하기로 했다. 그림들이 커야 관람객들을 압도할 수 있기도 했고 공모전에 낼 그림들의 사이즈로도 좋았기 때문이다. 내 작품은 ‘환영과 실재”라는 제목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잡지 화보 중 일부를 불에 태우거나 그을려서 다시 사진을 찍어 현상한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들이었다. 처음에는 광고의 해악을 지적하는 이야기였던 것이 점점 명품으로 소재들로 옮겨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런 것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옆에서 숨 쉬고 만져지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들에 집중하길 바랬다. 그래서 작품 제목이 ‘환영과 실재’로 지은 것도 있다. 무엇이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가? 광고 속 텔레비전 화면 속 세상인가? 내가 만지고 사랑할 수 있는 실재하는 것들인가? 그런 질문들을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다.
주현이의 작품은 김치를 그리는 작업이었는데 작품 제목은 ‘디지 로그’였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로 빠르게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아날로그 감성으로 살아가기라는 신조어인데 유리 용기에 담긴 김치가 그 ’디지 로그‘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모습을 구체화해 작품으로 구현해 내는 작업이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먹거리로 이제는 세계인의 먹거리가 되어버린 현재의 김치의 모습이 바로 ’디지 로그‘라는 것이었다. 빠르게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을 역설을 하는 작품이었다.
두 사람 다 디테일한 작업을 하다 보니 주현이는 안경을 두 번이나 바꾸어가며 그림을 그렸고 나는 눈 안에 실핏줄이 터져 나갈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우리의 일상은 그림을 그리는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곤했지만 가장 뜨거웠고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했다. 마치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 앞에서 몸부림을 치듯이 하루하루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림을 그렸고 오전에는 피 땀을 흘리며 일했다.
우리의 노력에 세상은 조금씩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가을에 진행되었던 대한민국 현대회화대전에서 나는 최우수상을 주현이는 특선을 받게 되었다. 졸업을 한지 아직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많은 성과들을 내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부부 화가의 면모를 점점 완성해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물론, 아직 결혼식을 올리진 않았지만 많은 화가들은 우리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휴가철은 지났지만 은식이와 짧지만 휴가를 가기로 약속을 했었다. 물론 주현이도 같이 말이다. 내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린 은식이는 직장을 얻으며 할부로 산 차를 끌고 나를 픽업하러 백화점 앞으로 왔다. 물론, 시간 약속을 해 주현이도 같이 타고 대형마트로 향했다. 간단한 조미료와 준비물들은 집에서 챙겨 왔지만 먹을거리를 전혀 준비하지 않아 사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삼겹살과 필요한 것들을 모두 샀는데 제법 비용이 나왔다. 이 얼마 만에 휴가인가 싶다가도 그려야 할 그림 걱정에 나 역시 머리가 복잡했다.
은식이는 이번 주에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었고 다음 주부터 물류에 출근을 해서 탑 코리아 동승 알바를 시작하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은식이는 일자리가 나왔다는 말을 듣곤 바로 사표를 냈다. 은식이도 인생에 또 한 번 모험을 걸고 있었다.
그렇게 무작정 떠나온 길이었다. 은식이가 졸업 여행을 갔다는 곳으로 무작정 향하고 있었다. 신두리라는 곳인데 펜션이 잘되어 있고 해변도 깨끗하고 좋다고 했다.
떠나는 길에 본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렀다. 아직은 8월 말이라 낮에는 살짝 땀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다. 뭐 해수욕을 하러 가는 길도 아니었고 머리나 좀 식히면서 좋은 공기에 기분전환을 위한 휴가였기에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뭔지 모를 해방감에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누구보다 은식이가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기분 좋게 신두리 하는 곳에 도착을 해서 펜션을 알아보러 들어가서 물어보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체크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달라고 사정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어디 가까운 곳에 민박이라도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신두리 쪽은 펜션단지가 워낙 거대해 민박 같은 것은 초입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때 불현듯 생각이 난 게 하나 있었다. 친척 형 중에 한 명이 서해 한쪽에 펜션을 차렸다는 말을 지나가는 말로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보니 둘째 고모의 큰 아들이었다. 원래 빌라를 지어 분양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었는데 3년 전에 지어 분양한 빌라가 완판이 되면서 그 돈을 투자해 펜션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우리 친척 중에도 이렇게 자수성가한 사람이 있었나 싶었다. 엄마가 미리 전화를 해줄 테니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백리포라고 했는데 내비게이션 검색을 해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백리포의 백사장은 고즈넉했다. 그 앞에 목조 건물로 지어진 펜션이 친척 형이 지었다는 펜션이었다. 나름 성수기는 지났지만 펜션은 빈방이 없었다. 친척형 네 내외가 기거하는 방 2층을 내어 줄 테니 편하게 쓰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초면과 다름없는 분들 이어서 민망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죄송했지만 신세를 지는 수밖에 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친척 형은 나를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한참 어릴 때 즉, 우리 부모님이 결혼하기 전에 유년시절의 기억을 많이 하고 있었다. 친누나가 낳은 아들이니 얼마나 귀여워했을까? 우리 아버지는 조카들에게 자상한 삼촌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내가 자랄 때 나를 엄하게 키우셔서 자랄 때 나는 아버지를 어지간히 무서워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척 형들은 우리 아버지를 참 좋아하는 걸로 봐서 아버지는 대체로 자상한 분이 맞지 않나 싶다.
바다낚시를 많이 해서 검게 그을린 친척 형은 밤에 또 낚시를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고기를 구워 먹기 좋게 불을 지펴 주셨다. 고기를 맛있게 구워서 소주와 함께 먹었다. 한 달 전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찾아온 은식이는 스트레스와 피곤에 절어 보였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다 털어내고 편안해 보였다. 앞으로 물류를 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하루 더 신세를 질 수 없어서 우리는 하룻밤만 머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짧은 휴가였지만 털어 낼 수 있는 것들을 털어낸 느낌이었다.
다시 돌아온 일상에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은 그림들이었다. 마저 정리를 하지 못한 그림들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작과 소품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어서 동시에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 다섯 점이나 되었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한 번에 묘사를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린다. 4~5번 정도 물감을 올려야만 그림이 어느 정도 내 눈에는 정리가 되어 보인다. 언제나 그림을 정리하다 보면 더 욕심을 내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여지도 없었다. 그렇게 붓을 놓는 순간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일본 개인전 같은 경우는 그림을 홍보할 팸플릿 제작도 해야 했다. 학원 제자였던 녀석이 출판 디자인을 한다고 해서 맡긴 상태였다. 만드는 김에 주현이와 내 명함도 함께 만들었다.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매일 그리는데도 그때그때가 달랐다. 긴 시간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면서 나름의 공식들이 하나씩 생겼는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약 3시간 정도 집중을 하면 그 뒤로 5시간 정도는 발군의 집중력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경우다. 대개 배가 고프거나 누가 찾아온다거나 갑자기 어떤 일정이 잡히는 등등의 경우가 생기면 리듬이 깨지기 일쑤인데 이럴 때가 나는 가장 예민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날의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아무리 겪어도 적응이 안 된다. 그래서 작품이 잘 될 때는 전화를 받지 않는 습관도 생겼다.
수현이 녀석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kisa라는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취직을 했는데 가깝다는 이유로 너무 자주 찾아와서 막걸리를 한 잔 하자는 것이 나로서는 바쁜 기간에 고역이었다. 찾아와 주는 것도 술을 한 잔 하는 것도 다 좋은데 나는 이때 너무 바빠서 시간을 쪼개서 쓰는 시기였기에 그랬다. 한 번은 온다 온다고 하는 것을 혼을 내서 못 오게 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한량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화가 본인에게 있어서 한 점 한 점 그림을 완성을 하는 것이 화가에게는 얼마나 고된 시간을 보낸 결실임을 작가 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은식이가 물류에 들어오고 나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영길이가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강릉 본가에 공사를 할 일이 생겼는데 꼼짝없이 영길이가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매달려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길이는 필진이 형에게 긴 휴가를 부탁했지만 형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인이 한 번 해보자는 광고 콘티작가의 제안도 일을 그만두는 상황에 일조했다. 만화를 그리는 능력을 눈여겨본 지인이 광고 감독을 소개해 줬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일을 줄 것 같이 굴어서 영길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게 일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내가 물류를 두 개를 받고 형이 하나를 가져가게 됐다. 불행의 서막이었다. 원래 벌던 페이보다 두 배 이상 벌게 됐지만 영길이 없이 일을 해내기에는 일이 너무 고됐다. 넷이서 하던 일을 세 명이서 하려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힘들었고 관리해야 할 매장도 3배 정도 늘어 반품이다 행사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받아야 할 전화도 몇 배 더 많아졌다. 그러면서 점점 삶의 질은 떨어져 갔다. 일이 끝나는 시간도 많이 늦어졌고 물건을 늦게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으며 일을 마치고도 불안한 상황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넘쳐나는 일은 나를 잠식시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