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무편집 감독판으로

내가 모은 도토리

by 치프람

# “여러분, 영화 좋아하세요?”


2019년 3월.

첫 번째 직장의 임기를 마치고 열린 송별회에서 내가 꺼낸 첫마디였다.


송별회의 주인공이라 앞에 서기 직전까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지…’를 반복하다가 결국 던진 질문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건 그냥 분위기를 잡기 위한, 일종의 어그로(?)였다.)

그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당시 적어두었던 메모를 다시 보며 겨우 떠올렸다.


“최근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정말 감명 깊게 봤는데요.
제 인생을 영화로 만든다면, 하이라이트 장면에 여러분이 등장할 것 같아요.
엔딩 크레딧에도 여러분의 이름이 올라가겠죠.
그만큼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는 3년이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KakaoTalk_20260201_210315141.jpg 송별회에서 받은 송별금(御餞別). 이별하는 사람에게 잘 다녀오라는 응원의 마음을 담아 돈이나 선물로 전하는 일본 문화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남는 특유의 여운과 공허함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져서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를 좋아한다. 큰 스크린, 빵빵한 스피커, 핸드폰도 잡담도 허용되지 않는 어둡고 차분한 분위기. 가끔 한 번 보는 만큼, 그 순간만큼은 제대로 몰입하고 싶어서다. 주변의 방해 없이 감독이 의도한 시간의 여백이라든지, 영화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음악,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그대로 느끼고 싶다.


# 내 인생을 한 편의 영화로 본다면?

이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Official髭男dism의 <115만 km의 필름(115万キロのフィルム)>이라는 노래를 듣고 나서였다.

115만 킬로미터는 한 사람의 인생을 필름의 길이로 환산한 상징적인 숫자라고 한다.

이 노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평범한 하루하루가 모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가 된다.'

연인에게 건네는 프러포즈 송이지만,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내는 일상의 가치가 가사 곳곳에 담겨 있어서 종종 이 노래를 친구들에게 추천하곤 한다.

나도 내 인생을 영화로 만들면 몇천만 장의 필름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날에 잔잔한 행복이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일상을 영상으로 남겨볼까?

사실 이 노래보다 먼저,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바로 ‘1일 1초 동영상’ 앱이었다.

나는 전형적인 ‘1월(그것도 일주일 정도…)만 빽빽한 다이어리형 인간’이라 기록을 하는 습관이 아예 없었는데, 미국에서 온 직장 동료 L이 소개해줬다.


어딜 가든 사진인지 영상인지 헷갈릴 만큼 빠르게 영상을 찍는 L을 보며 물었다.

“영상이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그러자 L이 말했다.

“1초면 충분해! 1일 1초 동영상이니까.”

그리고 L이 10일 정도 찍어둔 영상을 보여줬는데, 거기엔 나도 등장하고 있었다.

고작 저번 주의 장면인데, 왜 이렇게 오래전 기억처럼 느껴지는지...


그때 L이 덧붙였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지금 이 생활은 더 이상 일상이 아니게 되잖아.

그래서 기억하려고 이 앱을 시작했어. 치프람도 같이 해볼래?”


그래, 생각해 보니 우리의 임기는 3년. 끝이 정해져 있잖아.

임기가 끝나면, 타국에서의 일상이 귀국하면 일상이 아니게 되어 버리잖아!

그래서 완벽하진 않아도, 가능한 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꽤 오랫동안 일상을 담았고, 요즘은 인스타 스토리를 활용해 내 일상을 적극적으로 남기고 있다.


KakaoTalk_20260201_210928841_01 (1).jpg 지금은 추억이 된 3년간의 출근길


# 무편집된 인생마저 웃으며 볼 수 있는 삶

그러다 작년에『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의 한 문장을 읽고 잠시 잊고 지냈던 이 태도를 다시 떠올리게 됐다.

“이 책을 읽어도 인생이 좋아지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내 인생도 나쁘진 않다는 뜻밖의 진실을 가져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쁘진 않네’라는 마음을 매일 가질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좋은 인생이 아닐까.
하이라이트가 넘치진 않아도,
무편집된 인생마저 웃으며 볼 수 있는 그런 인생 말이다.”


# 가장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버렸어

일본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 K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이 3년을 뛰어넘는 행복한 시기가 또 올까 모르겠어.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아서…

미래가 좀 걱정돼.”


K는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의 인생이 훨씬 더 길잖아. 가능성도 훨씬 많고.

분명 더 좋은 시간이 올 거야.”


그 말은 맞았다. 이후 2년의 암흑기가 있었지만, 매일이 마냥 힘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매우 행복하고 바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좌절하고 힘든 날도 더러 있다.

그리고 힘들게 준비했던 그 하루하루의 노력이 모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냈을 수도 있다.


행복한 순간, 즐거운 썸네일 장면만이 아니라 내 인생 필름 전체를 웃으면서 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겠다. 내 영화는 넷플릭스가 아닌 영화관에서만 개봉한다고 생각하자.

힘들 땐 2배속으로 돌려보고 싶고, 지루할 때는 핸드폰을 보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남의 인생은 썸네일만 볼지라도

내 인생은 무편집 감독판으로 보면서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 그래서 올해의 키워드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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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영상으로 생동감을 더하고, 글로는 깊이를 더한 2026년 치프람의 기록.

기대하시라. 매월 개봉 박두!


올해의 목표는 한 달에 한 번 브런치 올리기.

혼자만 생각하면 또 흐지부지될 것 같아 독서모임에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들었다.

이로써 앞으로 4개월은... 무사 업데이트 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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