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람의 토이스토리

내가 모은 도토리

by 치프람

봄이 오는가 싶더니 미세먼지가 슬그머니 기지개를 켰다.

치프람은 오늘도 두 발로 걸어서 출퇴근한다.


[가방]

이제 좀 따뜻해졌다 싶더니 미세먼지가 또 기승이네. 다들 내 안에 잘 숨어있어.

치프람은 오늘도 걸어서 출근하네.


[닉 스타벅스 키링]

스타벅스 키링.png 중국에서 칸쵸가 사준 닉모양 스타벅스 키링

나도 너랑 같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긴 한데… 함께 견뎌보자.

근데 중국에서 나랑 같이 온 그 야광이 어디 갔어? 나랑 같이 달려있었는데.

복을 불러온다고 해서 선물 받자마자 가방 지퍼에 달아뒀는데 말이지.


[아이폰17]

걔 때문에 치프람이 나오시마 미나미데라에서 불명예 퇴장당할 뻔 했잖아. 그 때 이후로 빼던데?

미나미데라 들어가기 전에 작은 빛도 절대 안된다고 설명하시는 분이 신신당부했잖아.

그래서 치프람이 독서모임 S님한테 핸드폰 무음으로 해라, 화면 불빛도 절대 안 된다, 단단히 잡도리해놓고

정작 본인 지퍼가 빛나서 엄청 당황해 했잖아. 거기 안 갔으면 걔가 야광인 줄 아예 몰랐을 걸?

황급히 가방 안에 욱여넣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진땀이 나.

KakaoTalk_20260315_120355487_02.jpg 잠시 퇴출당한 야광 키링. 너는 죄가 없어...복을 불러준다고 했으니 조만간 다른 가방에 달아줄게ㅠㅠ


[지갑]

너 2025년 12월 31일에 새로 들어왔잖아. 9월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아이폰17]

내 뇌는 그 전 애랑 동기화가 되어 있거든. 요즘 보조배터리 잘 안보이지?

배터리 성능도 좋아졌고, 내면도 외면도 업그레이드됐지.

난 하드웨어는 갈아끼우면 되고, 소프트웨어는 업데이트하면 되거든. 사람들처럼 에이징커브도 없어.

나는 점점 강해진다구.


[파우치]

헤지지 않는 게 부럽다. 나는 요즘 치프람이 세탁을 게을리해서 많이 꾀죄죄해졌어.

근데 솔직히 데이터가 무한으로 쌓이는 게 무섭기도 해.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전 일은 싹 리셋하고 싶거든.

좋은 일도, 잊고 싶은 일도 내 의지로 기억하는 게 아니잖아.


[티슈]

나는 495,766기야. 우리 가문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

선배들이 죄다 비염으로 명예롭게 자연으로 돌아가셨거든.

얼마 전엔 감기까지 걸려서 하루에 두 통씩 소환되는 거 있지. 으이그, 그러니까 코가 다 헐지.

이러다 올해 안에 500,000기를 넘길 기세야. 역사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겠는걸.

치프람이 J라서 그런지 나를 빠뜨리고 나간 적은 없어.

이 가문에 입성한 이상 끝까지 함께하는 거야.


[손수건]

나는 치프람이 눈물 날 때 닦아야하니까 항상 곁에 두는건가 했더니,

작년에 딱 한 번 동률 오빠 콘서트 때만 쓰고 대부분 땀이랑 손만 닦더라.

그날 진짜 웃겼는데. 피톤치드 S랑 둘이 시작 전에 “울지 말자~” 하고 서로 놀리더니,

끝나고는 둘 다 펑펑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버린 거야.

근데 또 다음 날 출근은 해야 하니까 눈물 닦으면서 서로 다른 호선 지하철 타러 뛰어가는데…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웃기던지. 아 이걸 너네가 봤어야 했는데~

가방을 바꿔서 못본 애들이 있어 아쉬워ㅋㅋㅋ

나는 치프람이 언젠간 본인보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먼저 닦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어.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어른으로.


[지갑]

아니, 얘 또 부산가서 흥청이 망청이했어. 나 더 홀쭉해진 거 있지.


[파우치]

내비둬~. 이럴 땐 거지라고 놀리지말고 물건부자네~라고 칭찬해주자.

그리고 지갑아, 넌 원래 현금도 안 넣고 다니잖아. 뭐가 홀쭉해졌다고 난리람.

라떼에 가려졌으나 킹받는 표정은 제대로 나온 파우치


[지갑]

너 T니? 너무하네. 곰돌이 표정도 킹받아. 꼬질꼬질해가지고. 근데 이번엔 쇼핑 말고 먹는 데 많이 썼어.

좋아하는 카페도 많이 다녀왔고! 작년 추석엔 가족들이랑 다투기도 하고 비도 계속 와서 속상해했는데,

이번 설에는 날씨도 좋고 즐거운 시간 보내서 많이 행복해하더라.


[아이폰17]

맞아 맞아. 작년에 엄마한테 짜증낸 거 미안하다고 카톡 보낸 거 내가 봤지.

이번엔 광안리 산책하면서 가족들한테 필사책이랑 펜을 선물해줬더라고.

매일 한 장씩 쓰고 서로 찍어서 공유하는데, 그냥 생사 확인 수준의 안부보다 훨씬 깊은 대화가 오가더라고.

쓴 내용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주제도 다양해지고 좋더라. 그 모습이 괜히 애틋하고 귀여워서 흐뭇했어.


[지갑]

그러네. 그렇게 치면 치프람의 행복은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 것 같아. 에휴, 어쩔 수 없지.

내가 앞으로 통장이랑 잘 조율해서 힘을 줄 데만 입 열고, 아닐 때는 꾹 닫을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치프람을 미래에 거지 할머니로 만들 순 없잖아.


[아이폰17]

치프람이 요즘 공간 기록을 다시 시작했더라고. 4년 만에 올린 거 보니까 조금 대견하기도 하고.

역마살도 풀 겸, 오랜만에 되찾은 취미 다들 응원해 주자. 이게 미래에 어떤 투자가 될지 또 모르잖아!

내가 미니에서 17로 바뀌었더니 몸도 좀 커지고 그립톡도 사서 자리가 좁네. 다들 미앙~


[가방]

얘들아 자리가 좀 좁지? 치프람이 이것저것 넣기엔 내가 좀 작은 것 같아 미안해.

올해는 치프람도 비우는 연습을 해봤으면 좋겠어.

핸드폰 용량도, 집 안의 물건도, 굳이 힘들게 애써야 하는 관계들도.

단순하게 바라보고, 한번 다이어트해 보자. 비워야 새로 넣을 공간이 생기는 거니까.

물론 우리와는 더 오래 함께 해야지!


오늘도 가방 지퍼가 닫힌다.

그 안에서 친구들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기댄 채,

치프람의 하루가 평온하게 마무리되기를 조용히 바라고 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치프람이 갑자기 파우치를 꺼내 세탁기에 넣는다.


잠깐의 침묵.


우리 대화가 들렸을까?



Epilogue


내가 속해 있는 글쓰기 모임의 이번 달 주제는 “What’s in my bag?”이었다.

가방을 열어 늘 나의 일터에 함께 출근하는 사물들을 살펴보고, 그중 어떤 사물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잘 담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 주제였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보니 나는 '여기엔 무조건 이 브랜드!'라든지, '이건 내 애착 물건이야!' 같은 게 의외로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하나의 사물을 깊게 파기보다는, 차라리 여러 사물을 모두 등장시키는 짧은 장면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릴 때 나는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대신 혈육과 둘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데 조용히 책을 읽고 있으면 왠지 더 외롭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서, 대부분 TV나 애니메이션을 틀어두곤 했다. 보지 않더라도 백색소음처럼 켜두는 느낌이었다.


내가 일곱 살 때, 엄마가 산타클로스에게 “치프람은 만화를 너무 좋아하니까 비디오테이프를 선물해 주세요.”라고 적어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속으로 조금 야속했다. 좋아서 보는 거 아닌데.

그래도 선물을 받는다는 건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산타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곱 살의 치프람은 내심 조금 기뻤던 것 같다.


그때 받은 비디오가 토이스토리 2였다. 다른 비디오들도 꽤 많았던 것 같은데, 유독 그 작품만 반복해서 많이 봐서 그런지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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