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의집 도토리
# 꽃에도 기세가 있다.
"여러분, 꽃에도 기세가 있다는 거 아세요?"
독서모임에서 D님이 말했다.
이게 무슨 소리람?
"한 종류의 꽃이 피기 시작하면, 다른 꽃들도 거의 동시에 우르르 피어나는 현상이래요."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라 클로드에 검색해 보니. 하나의 꽃이 피었다는 건 우연이 아니라 이미 개화 조건이 무르익었다는 신호라고 한다. 같은 환경 속에 있는 다른 꽃들도 그 조건을 함께 충족하게 되면, 기온이 오르는 순간 일제히 터지듯 피어난다는 것이다.
내 출근길은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 그 덕분에 다양한 꽃과 나무들을 보며 계절을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요즘은 산수유, 매화가 한창이다. 예전에는 그저 '봄이 오는구나~' 정도로만 느꼈는데, '꽃의 기세'라는 이야기를 듣고, 며칠 전 매화가 서너 송이 피어 있는 걸 보고 '이제 곧 확 피겠네'라고 생각했더니 정말 이번 주에 거의 다 피었더라.
아, 이게 기세구나.
그래서 이 내용이 어떤 책에 나오는지 알려달라고 했더니, D님도 정확한 출처를 알고 싶어 여러 가지 찾다가 본인이 생각한 맥락과 딱 들어맞는 언급 내용을 못 찾았다고 했다.
그 대신,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꽃 기르는 분들이 꽃이 안 펴서 걱정일 때 '세력 잡기'를 한대요. 그 세력만 키우면 이제 꽃이 핀다고. 식물은 직접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 에너지를 넘겨줄 수는 있는 건가 봐요."
오호라, 세력 잡기?
또 클로드로 검색해 봤더니, '세력 잡기'란 한마디로 '꽃을 피우기 위한 체력 비축'이라고 한다.
그래서 꽃이 피지 않을 때는 조급해하기보다, 햇빛을 충분히 받게 하고, 뿌리를 정리하고, 물을 잘 주어 잎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 식물은 때가 되었을 때 스스로 꽃을 피운다고 한다.
결국 중요한 건 ‘지금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내용을 읽으며 사람에게도 '기세'와 '세력'이 있다고 느꼈다.
2015년, 나는 모든 시험과 자격증에 떨어지도 취업도 뜻대로 되지 않아 다시 준비하던 시기였다. 막막한 마음에 처음으로 사주를 보러 갔다. 끝이 언제인지 알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곳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2015년은 뭘 해도 잘 안 될 가능성이 커요. 대신 2016년부터 운이 확 풀리는 해예요. 그러니까 2015년은 준비의 해라고 생각하세요."
그 한마디에 힘든 시기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어차피 잘 안 되는 해라면, '왜 안되지?'가 아니라 '얼마나 준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나는 그래서 '운'을 수치화한다면, 내 멋대로 운은 노력에 곱해지는 게 아니라, 제곱으로 커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예를 들어, 노력이 3일 때 운이 따라주면 결과물은 9가 되고, 노력이 5일 때는 결과물은 25가 된다. 그래서 같은 운이라도, 준비해 둔 만큼 결과의 크기가 많이 달라진다.
예전에는 '언젠가 좋은 날이 오겠지'하며 사과나무에 열매가 맺히기만 기다리는 소극적인 태도였다면,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년에 기운이 좋다고? 그럼 사과나무 한 그루 더 심어야지.'
# 첫 벚꽃이 피었다는 걸 하나의 고목으로 판단한다니요?
재작년 읽었던 우시사의 내용 중, 가장 인상이 깊었던 내용이었다.
허술하고도 아름다운 봄의 시작.
2024.11.20 [우시사] 나에게서 온갖 '처음'이 발생하도록
국립기상박물관
그런데 무엇보다 제가 이곳을 말하는 이유는 앞마당에 있는 ‘계절 관측 표준목’ 때문이에요. 우리가 방송에서 ‘오늘 서울에 첫 벚꽃이 피었습니다’ 혹은 ‘첫 단풍이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알까 궁금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선언하는 데에 기준이 되어주는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 벚나무에 꽃이 세 송이 이상 피게 되면 첫 벚꽃이 되고요. 이곳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첫 단풍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을 그렇게 정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싱거워 헛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절을 관측하는 것이 어떤 기계가 아니라 고목古木이라서 그게 참 허술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눈’이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누군가는 마주치고 누군가는 놓치기 십상. 기상관측소에서 공식적으로 첫눈을 기록하더라도, 첫눈을 목격한 사람에게만 첫눈이 되는 것이니까요.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정확한 기준을 세울 수 있음에도, 이렇게 조금은 느슨한 방식으로 '처음'을 정한다는 것,
그 허술함 속에 더 큰 아름다움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바로 낭만의 힘이 아닐까?
올해도 다양한 낭만으로 채워나가는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매일이 달콤하지만은 않겠지만 쌉싸름한 날이 찾아오더라도 덕분에 너무 달지 않은 맛있는 초콜릿을 맛보았다고 생각하자.
# 제일 추울 때 제일 먼저 피는 '풍년화'
다도를 조금 배우고 싶어 최근에 다도 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첫 모임의 숙제가 영화 '일일시호일'을 보고 오는 것이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은 '날마다 좋은 날', '하루하루가 모두 좋은 날이다'이란 뜻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처음 다도 교실에 갔을 때 벽에 이 글귀가 붓글씨로 걸려 있고, 주인공이 수십 년에 걸쳐 다도를 배우며 그 의미를 서서히 깨달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걸 보는 나 또한 함께 깨달아갔다.
다도는 지금 이 순간, 오늘 하루도 그 자체로 소중한 날임을 몸소 증명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계절의 변화, 시간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절기와 계절마다 다른 화과자가 나오고, 솥을 올리는 도구, 벽에 걸리는 족자, 다기 종류도 절기마다 다르게 바뀐다.
영화 시시 일호시에서 주인공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풍년화', 일본어로 'マンサク(만사쿠)'라는 꽃이 꽃이 등장한다.
영화 속 다도 선생님은 풍년화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まず咲く(먼저 핀다)」 → まんさく → マンサク
즉, '가장 추운 시기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이 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든다는 뜻의 ‘満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고 한다.)
꽃에게 가장 힘든 시기는 가장 추운 시기일 텐데, 그럼에도 피어야 하는 풍년화가 조금 가엾기도 하면서 응원하고 싶어졌다. 살다 보면 나의 2015년과 같이,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니까.
지금 힘든 것도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
'잘 될 거야!'라는 밝은 응원 보다 더 묵직하게 다가온 조용한 위로였다.
Epilogue
봄이랑 어울리는 넘의집 도토리 한 보따리 가져와봤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더더욱 봄이 더 기다려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