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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생활 Jan 31. 2021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

 '한복공정', '김치공정'의 기원

코로나19와 백신 개발에 모든 이목이 쏠리고 있던 2020년 11월, 뜬금없이 ‘게임판 동북공정’이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단어가 붙어 인터넷 뉴스로 등장했다. 이름부터 심란한 ‘샤이닝니키’라는 중국 게임이 그 중심에 있었다. 샤이닝니키는 게임 속 캐릭터를 스타일링 하는 게임인데 이 캐릭터의 의상으로 한복 세트가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당연히 국내 유저들은 한국의 전통 의상이 나온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고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한복 세트 아이템이 공개되자 중국 유저들 쪽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한복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의상이라느니, 중국 명나라 복식이라느니 하며 중국으로부터 유래한 의상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따진 것이다. 중국 유저들의 항의는 트위터로 번져나갔고 샤이닝니키의 게임사 페이퍼게임즈는 성명서를 통해 ‘본사는 조국과 입장이 일치하며 국가의 이익에 해로운 행동은 거부한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와 유저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양새였다. 페이퍼게임즈의 한복에 대한 의견이 불분명하고 오히려 중국 유저들의 말도 안 되는 항의에 간접적으로 동의하는 모습이 나타나자 이제는 한국 유저들과 네티즌들이 들고일어나게 된다. 이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한국의 고대사를 중국의 것으로 왜곡한 ‘동북공정’에 빗대어 ‘게임판 동북공정’, ‘한복 공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제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통, 이 정도로 논란이 발생하면 빠른 태세전환으로 사과할 만도 한데, 페이퍼게임즈는 돌연 한복 아이템을 삭제하고 환불한다는 공지글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중국 유저들에게 거듭 사과의 입장문을 게시한다.


"한복은 우리 중국에서 유래한 거야, 페이퍼게임즈, 조국의 문화를 이렇게 취급해?"

"죄송합니다. 당장 한복 아이템을 삭제하겠습니다. 기분 푸세요!"


와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샤이닝니키의 국내 서비스를 종료하기에 이른다. 한국 유저들은 몹시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한복을 중국 것이라 주장하는 중국 유저들의 행패도 어이없었지만 페이퍼게임즈의 대처는 몹시 괘씸한 것이었다. 한복은 당연히 우리 전통 의상이라는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은 중국의 거센 대응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는 의문, ‘대체 동북공정이 뭔데?’


한복 공정의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 이번에는 ‘김치 공정’이 휘몰아쳤다. 중국 매체에서 ‘파오차이’가 김치의 국제표준으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 백과사전에 ‘김치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며 논란은 증폭되었다. 사실 파오차이는 제조 방식부터 발효과정까지 김치와 다르고 오히려 피클에 가까운 식품이다. 논란을 정리한 것은 국제표준화기구(ISO)였다. 중국이 근거로 삼은 표준이 김치와는 무관하다며 반박한 것이다. 파오차이와 김치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중국의 문화 침탈은 음악에서도 나타났다. 우리 창작 동요인 ‘반달(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노래)’과 ‘아리랑’을 중국 소수민족인 조선족이 부르는 노래라고 알리고, 아리랑을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버린 것이다. 현재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유네스코가 실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막무가내인 것 같은 중국의 문화 침탈, 문화 공정은 앞으로도 광범위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조선족이라는 좋은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19세기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후손이다. 이 지역의 상당수 조선인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원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남아 있던 사람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중국 국적을 받고 조선족이 되었다. 조선족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13번째의 큰 규모로 옌볜조선족자치주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족은 법적으로 중국인이지만 역사적으로 조선인의 후손이며 조선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앞으로 조선족의 정체성을 확실히 중국인으로 만들어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조선인의 문화’, 즉 우리 고유의 문화를 중국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문화 공정은 이제 시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의 ‘한국 것 빼앗기’가 있을 때마다. 그 앞에 ‘동북공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북공정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알아야 중국의 뻔뻔한 행위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

동북공정의 원래 명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으로 변강은 국경 부근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말로 풀면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중국 동북지역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淸)을 세운 만주족의 고향, 만주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특정 종족을 떠올리게 하는 만주라는 명칭보다는 중국 동부라고 하여 중국 내부의 한 지역으로 부르고 싶은 속내가 엿보이기도 한다. 중국 동북지역은 지린성(길림성), 랴오닝성(요녕성),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의 이른바 ‘동북 3성(그림 1)’을 범위로 하는 곳이다. 중국은 국가 사업으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동북 3성에 등장했던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연구하고 수많은 보고서를 쏟아 냈다. 문제는 그들이 연구한 역사가 한국 고대사의 주축을 이루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라는 것이다.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동북지역에 존재했던 민족들이 중국의 민족이고 그들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갑자기 우리 집에 중국인이 찾아와


"제가 조사해 보니 당신 고조할아버지는 우리 가문의 사람입니다. 제대로 알아보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한반도가 들썩이고 있을 때 동북공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역사 왜곡이 급발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은 갑자기 왜 동북공정을 추진한 것일까? 그리고 그동안 한국사로 분류했던 민족과 국가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 것일까?


중국의 동북공정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부터 이해해야 한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쉽게 말해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이 중국에 존재했는데 이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결국에는 ‘중화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드래곤볼이라는 일본 만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주인공 손오공과 베지터가 ‘퓨전’이라는 기술을 통해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합쳐지면 하나의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하는데 재밌는 건 이름이 ‘오지터’이다. 손오공+베지터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존재가 융합되면서 새로운 단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도 퓨전과 의미가 비슷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중국의 역사는 수많은 민족이 ‘중화민족’으로 융합되는 과정의 역사이고 그렇게 현재의 중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현재 중국의 영토 내’에서 활동했던 민족은 모두 중화민족이며 중국의 역사라는 인식도 나타났다. 중국은 지금도 한족 외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는 ‘한족+55개 소수민족=중화민족’이다. 결국, 이것은 중국 내부의 단결과 통일을 위한 중국 중앙 정부의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은 지금도 소수민족들의 분리·독립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은 군대 배치와 유혈 사태가 발생할 만큼 갈등이 깊다.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의 민족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 관점에서 남 일 같지 않은 일이다.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은 모두 독립 국가로 존재하다가 1949년 중국 인민군에게 점령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그러다 보니 종족의 정체성도 강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도 큰 상태다. 티베트는 불교 국가로 ‘달라이 라마’라고 하는 종교 지도자가 수장인데 현재는 인도로 망명하여 독립을 선전하고 있다. 위구르족은 이슬람 민족으로 다른 이슬람 세력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위구르족의 경우 IS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과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라 테러에 대한 공포가 중국에 부담이 되고 있다.


이처럼 중국 내부의 소수민족들의 정체성과 분리·독립 움직임은 중국 중앙 정부를 크게 위협했다. 당장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이 독립하게 되면 중국은 전체 면적의 1/4을 잃는다. 단순히 영토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천연자원(특히 석유)과 지정학적 이점도 잃는 것이었다. 하나의 독립은 또 다른 독립을 불러올 것이고 55개의 소수민족이 저마다의 이유로 분리·독립을 요구한다면 중국으로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가 찾아올 것이었다.


중국은 대책이 필요했다. 소수민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국가 이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이었다.      


“듣고 있나 티베트, 위구르! 우리는 같은 중화민족이야 우리 조상들이 중화민족의 형성과 발전을 위해 얼마나 힘썼다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뭐? 독립?”     


이라고 외치며 중국 중앙 정부는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에 대한 ‘역사공정’을 추진한 것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뒤흔들만한 연구 결과가 나와야 했다.


이제 다시 동북 3성으로 돌아와 보자. 동북 3성 중 지린성의 옌볜에는 조선족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 현재 조선족은 티베트족과 위구르족과 같은 분리·독립 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母)국이라 할 수 있는 북한의 국경과 마주하고 있고 한국에도 진출하여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중국 중앙 정부 입장에서 조선족은 한반도와 너무 가까이 있는 게 문제였다.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옌볜에 모여들어 조선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것도 신경 쓰이고 한국에서 재외동포의 법적 지위를 누리는 것도 못마땅한 일이었다. 본래 조선족은 재외동포로 등록되지 못했는데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많아지면서 법 개정의 목소리가 커졌고 결국 2004년 재외동포법이 개정되면서 ‘정부 수립 전’ 국외 이주 동포도 대상자가 되었다. 조선족이 한국과 가까워지려 할수록, 또 이를 한국이 받아들일수록 중국 중앙 정부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자!’, ‘우리는 만주 벌판의 후예!’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한국인들의 움직임은 동북지역을 지켜야 한다는 경각심을 더욱 높였다. 특히 지린성의 간도(間島)라는 지역은 조선 후기 조선인들이 건너가 개간한 곳인데 대한제국 때 고종 황제가 간도관리사까지 파견하면서 우리 영토로 관리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1909년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고 중국에 넘긴 후 우리는 간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에도 간도문제는 꽤 자세히 다루고 있고 ‘잃어버린 우리 땅’이라는 인식을 주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조선족의 정체성도 문제지만 동북지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잃어버린 땅’이라는 인식도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중국 중앙 정부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따라 조선족의 정체성을 한민족이 아닌 중화민족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동북지역에 대한 역사공정, '동북공정'을 통해 조선족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2004년 중국이 자국 내 고구려 유적을 북한과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조선족의 ‘한민족’ 정체성을 자극하는 찬란한 뿌리를 헤집어놔야 이들을 중화민족으로 융합시키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위대한 광개토 대왕의 후손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조선족에게 광개토 대왕이 ‘사실은 중국인’이었다는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버리고 중화민족으로 합류할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지역은 물론,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에 대한 인식도 바꾸는 것이었다.


"만주를 되찾겠다고? 고구려는 우리 중국의 역사야. 한반도 북부야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땅이야!"


라는 주장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대체 중국은 무엇을 근거로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주장한 것일까? 동북공정을 파훼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를 정확히 인식하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뒷걸음친다면 중국은 성난 살쾡이처럼 달려들어 물고 늘어질 것이다.      

      



먼저 고조선에 대해서 중국은 단군이 세운 조선은 전설·신화로서 인정할 수 없고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라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고조선의 실체라고 말한다. 기자는 기원전 12세기 중국 주(周)나라의 인물인데 중국 사서에 조선에 건너가 문물을 전하고 조선왕에 봉해지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국은 이를 토대로 주나라의 책봉(관직에 임명)을 받은 기자조선(고조선)을 중국의 지방 정권(중앙에 속하는)이라 보고 자신들의 역사로 인식한다. 우리 학계에서는 기자라는 인물의 존재는 인정하나 ‘기자가 조선에서 왕이 되었다.’라는 내용은 후대의 조작으로 보고 있다. 기자조선의 근거가 되는 중국 사서들이 일관성도 없을뿐더러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사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기원전 3세기 이후부터 ‘갑자기’ 등장하고 있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기원전 12세기경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 고조선 지역 청동기 문화는 성격이 다르다. 만약 기자가 조선을 세웠다면 중국식 청동기 문화가 발전 해야 했는데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기자조선에 물음표가 그려질 수밖에 없다.


중국은 고구려를 한족을 중심으로 예맥족과 같은 중국 고대 민족이 함께 세운 국가로 파악했다.(마찬가지로 부여도 중국 고대 민족이 세운 국가로 파악한다.) 따라서 고구려도 중국의 역사이다. 본래 중국에서는 고조선, 고구려 모두 한국사로 분류했는데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시점에 따라 중국의 역사이기도 하고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즉 고구려의 중심지가 중국에 있었을 때는 중국의 역사에 속하고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중심지가 한반도 북부가 된 뒤부터는 한국의 역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이를 학계에서는 '일사양용史兩用'의 역사 인식이라 한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러서는 아예 고구려사 전체가 중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다 신라나 백제까지 자신들의 역사라고 나설까 무섭다.


중국은 고구려를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지방 정권으로 보고 있다. 이때 많이 거론되는 것이 중국 여러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였다는 것이다. 조공·책봉은 군주가 지방 세력에게 책봉을 내리면(관직에 임명) 책봉을 받은 지방 세력이 공물을 진상하는 의례이자 체제였다. 그러므로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를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고 종속된 지방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세계에서 조공·책봉은 실질적인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 형식, 그러니까 의례에 가까웠다. 예를 들자면 명절에 집안의 큰 어른을 찾아 뵙고 절을 하며 선물을 드리는 ‘의례’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때 부모님과 나는 큰 어른에 종속된 상태인가? 가풍에 따라 큰 어른의 의사결정권이 강할 수 있지만, 그것이 군신 관계와 같은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의 관계가 아님은 모두가 알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조공·책봉 체제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고구려를 세웠다고 알려진 예맥족은 동이족의 한 일파로, 동이족은 중국 고대인들이 자신들과 다른 부류로 구분했던 집단이다. 한자 그대로 ‘동쪽에 사는 오랑캐’로 인식했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오랑캐’라 칭하며 멀리했던 존재를 이제 와서 선조들과 융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도 중국 왕조와 구분되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신라에서는 고구려·백제를 통일하면서 ‘일통삼한(세 개의 한韓을 통일)’이라 했다. 삼국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한韓에서 기원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신라 이후 한반도를 다시 통일한 국가가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만 보더라도 고구려의 진정한 후손이 누구이고 그들의 역사가 어디로 계승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발해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책봉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남·북한에서 주장하는 고구려 유민이 아니라 말갈인이라고 주장하며 중국의 지방 민족인 말갈족이 세운 발해는 당연히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조공·책봉 체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더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남은 건 대조영의 정체인데 중국의 사서가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보는 경우와 말갈인으로 보는 경우로 나뉘고 있어 논쟁을 일으킨다. 발해가 존속하고 있던 시기와 가까운 사서가 대조영을 고구려인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신뢰가 가기도 하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말갈인이라는 기록도 받아들이면서 대조영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바로 대조영을 ‘말갈계 고구려인’으로 해석한 것이다.


대조영 가문은 본래 말갈족이었으나 고구려에 정착하여 ‘고구려화’되었고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고구려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조영의 출신을 이야기할 때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거론되는 것으로 본다. 발해가 건국 이후 말갈이 아닌 고구려 계승의식만 표출했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재로서는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동북공정에 따른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대한 중국의 인식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삼국사기』·『삼국유사』부터 유득공의 『발해고』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은  관점에 따라 누락시키기도 했지만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우리 역사로 서술하며 후손으로서의 자각을 유지했다. 하지만 중국의 어떤 왕조도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대한 계승의식을 표출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역사로 다루지도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진실을 가리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동북공정의 기본적인 배경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중국의 내부 안정을 위한 ‘중화민족 만들기’로 설명할 수 있다.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한 결과다. 그런데 동북공정의 의도를 더 적극적인 자세로 분석하여 한반도 북부, 현재의 북한 지역에 대한 연고권(재산 등을 넘겨받을 우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만약 북한에서 돌발상황이 발생하여 국가 붕괴에 이르렀을 때 중국이 ‘우리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자’라고 하며 한반도 북부를 차지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 지역이 한국에 넘어갈 경우(남북통일) 최대의 적인 미국의 군대를 국경에서 마주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 고구려, 발해(모두 한반도 북부를 차지했던 국가들)를 자국의 역사로 만들어야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2021년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게임공정’, ‘김치공정’과 같은 중국의 ‘문화공정’만 보더라도 미래는 알 수 없는 것 같다.


동북공정은 2007년 종료되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중국 학자들의 연구물은 쏟아지고 있고 이에 따라 중국의 역사 교육도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동북공정 사관에 따라 역사를 배운 중국의 10대~30대들은 또 다른 ‘공정’을 일으킬 수 있다. 중국 학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양심적인 연구와 발표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중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배운 것을 사실로써 받아들이고 중국의 애국주의에 고무되어 새로운 ‘공정’을 추진할 수 있다.  


동북공정에 대응해 한국에서는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을 설립하여 동아시아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에 힘썼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우리도 학술적인 대응과 반박을 하기 위해서였다. 2006년 고구려연구재단은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흡수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동아시아사 역사를 연구하며 한·중·일간의 역사 분쟁을 조명하고 합리적인 대응에 노력하고 있다. 국가 안에서의 역사 인식 차이와 논쟁은 연구의 축적이나 학술 대회 등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될 수 있지만, 국가 간의 역사 논쟁은 각 국가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되어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을 상대로 단기간에 어떠한 출혈도 없이 외교적 성과를 얻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한·중 공동 연구로 당사국이 모두 인정할 만한 합리적인 역사 인식을 도출하는 것인데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 문제를 학자들에게만 맡기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수업 시간 동북공정을 가르칠 때면 복잡한 마음이 앞선다. 동북공정을 백지화시키고 중국의 주장을 단번에 철회시킬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의 역사 왜곡과 올바른 역사 인식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면 역사는 계속 이어져 갈 것이다. 지금의 이 글이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完)



<참고문헌>


동북아역사재단, www.nahf.or.kr     

고구려연구재단, 「중국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바로 알기」『고구려연구재단 시민강좌자료집』, 2004.

윤휘탁,「「東北工程」과 韓半島 ‘방어적 전략’인가, ‘공세적 전략’인가」,『만주연구』2, 2005.

송기호,『동아시아의 역사분쟁』, 솔,  2007.

정문상,「역사전쟁에서 역사외교로-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양상」,『아시아문화연구』15, 2008. .

이천석,「'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관점에서 본 동북공정」,『국제정치연구』13(2), 2010.

김성일,「동북공정 이후 중국 학계의 한국사 연구동향」,『한국근현대사연구』55, 2010.

동북아역사재단, 『한중 역사 현안 바로알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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