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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다 Jun 18. 2023

별  거 아닌 이야기

하지만 몹시 궁금한 이야기

느닷없이 그리고 뜬금없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랜 기억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런 기억들 대부분은 너무도 사소하고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라 나에게 그런 일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어째서 그 기억이 아무 맥락없이 지금 갑자기  떠오르는지 알 수 없어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방금 전처럼 말이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라 쇼파에 누워 핸드폰을 들고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별안간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어떤 여자 아이가 내 책상 위에 딸기 우유를 놓더니 먹으라고 한다. 아침일 때도 있고 점심 시간일 때도 있고 쉬는 시간 일 때도 있다. 내 앞자리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는 내가 천천히 우유팩의  입구를 열어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시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안녕?" 하며 우유만 툭 놓고 교실을  나가기도 한다. 화장실이나 옆 반에 다녀 온 사이에 책상 위에 딸기 우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도 있다.


같은 반이었던 그 애와 나는 일년 동안 '안녕' 또는 '이거 먹어' 를 제외한  말은 나누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조용히 딸기 우유만 주고 받는 우리의  모습을 반아이들은 기묘하고 신기하게 생각한다. 나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고 불편하다. 그런데도 나에게 이걸 왜 주는지 묻지 못한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전국 대회에서 항상 우승을 휩쓰는 하키부가 있었는데 운동부답게 새까만 피부에 키가 매우 컸고 덩치도 남자아이들만 한데다 말투도 거칠어서 위화감과 위압감이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하키부원은 오전수업만 들었는데 교실에 들어와있는 시간에는 늘 잠만 잤기 때문에 친하게 지낼 만한 기회도 없었다.


나에게 매일 딸기우유를 준 아이가 바로 하키부원이었다. 내성적인 나는 그 아이가 어렵고 무서웠다. 무섭게 생긴 운동부 아이가 내미는 딸기우유를 받으며 도저히 "왜?"라고 물을 용기가 없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주는 우유를 받고 그럼 그 애는 아주아주 작게 싱긋 웃고는 교실을 나갔다.




왜 갑자기 이 기억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기억이 굉장히  생생해서 또 당황스럽다. 그리고 후회스럽다. 그때의 나는 물어봤어야 했다. 나에게 왜 매일매일 딸기 우유를 사다 주는지. 혹시 나와 친해지고 싶은 건지.

모지리같이 잔뜩 쫄아서는 주는 우유만 넙죽넙죽 받아마셨다니. 열일곱살의 내가 그런 바보였다니.


그 애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애도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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