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걸음

by 영백

위쪽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탑니다.
그런데 올라가는 방향이 아니라 내려오는 방향입니다.
갈아타지 못하고 그냥 걷습니다.
에스컬레이터는 하염없이 내려오고
어쩔 수 없이 계속 걷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그래도 그냥 걷습니다.
걸음을 멈추면 아래로 내려갈 테니까요.

남들이 보기에는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 보일 겁니다.
마치 고요한 연못 위에 떠 있는 백조처럼.


물 위는 고요하지만, 물 밑에서는 쉼 없이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삶에도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걸 다 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
죽어라 노력하는데도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멈춤이 아닙니다.
흘러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변화가 없지만,
내 안에서는 분명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결과로 판단합니다.

성과가 있는 사람을 인정하고,
빨리 올라가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버티기 위해 당신이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흔들렸는지, 얼마나 견뎠는지.”


때로는 오히려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흘러내리는 현실 속에서
나만의 속도로 버티고, 걸음을 이어가고,
비록 한 계단도 올라가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조는 물 위에서 우아하게 보이지만 그 우아함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발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제자리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안에는 쉼 없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올라가는 게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걷는 시간이다.”

그 말은 비겁함이 아니라 내 삶을 끝까지 붙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계속 걷고 있다면, 심지어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 위라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 보든, 어떻게 판단하든, 당신만은 알고 있으면 됩니다.

제자리걸음처럼 보이는 시간도 사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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