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by 여백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할 일이 없었다. 동전 넣는 소리 이후로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자에 앉아 벽을 봤다. 하얀 벽에 붙은 안내문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몇 번이나 읽은 문장인데, 오늘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서 세탁기가 흔들렸다. 물과 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누군가 대신 숨 쉬어주는 것 같아서 조금 편해졌다.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확인할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화면이 꺼지자 손도 같이 힘을 잃었다.


유리창에 비친 내가 생각보다 또렷했다. 집에 있을 때보다, 아무도 모르는 이 공간에서 얼굴이 더 선명해 보였다. 그게 이상했다.


건조기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괜히 일어나서 안을 들여다봤다. 옷들은 따뜻하게 겹쳐 있었다. 내가 빠져 있는 자리만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앉았다. 의자가 차가웠다. 잠깐 졸았던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하지는 않았다. 요즘엔 깨어 있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인사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 사람도 나를 보지 않았다. 서로를 모르는 채로 같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세탁물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따뜻함이 손에 남았다. 집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그 사이에 이 온기가 식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왔을 때 공기가 생각보다 서늘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잠깐이라도 뭔가를 데워봤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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