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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주 Apr 01. 2024

현재 1. 쉰넷, 하고 싶은 게 많아서 불안한 여자

미술치료에서 시작한 과거 여행. F가 T가 되기까지.

○○센터”에서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진로강사 양성과정’에 지원을 했다.

힘든 시기 동안 집중할 게 필요했고,  자격증을 여러 개 따두었다. 

국가자격증인 직업상담사 2급도 그 자격증 중의 일부다. 

딸의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진로진학지도사가 되고싶었는데,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자격증이 아까워서 2:1의 면접 경쟁을 뚫고 양성과정에 들어갔다.

학습자들은 첫날부터 과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대표의 눈에 들어 강사가 되고 싶은 게 최종목표니 그럴 만도 하다. 경력단절 여성들의 이전 경력은 화려했고 말주변도 청산유수였다. 그리고 젊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은 빛났다.  

50대는 3명, 내 나이가 가장 많았다. 30~40대는 진짜 경력단절 여성이었고, 50대는 현재 강사를 하고 있지만 수익이 적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글쓰기 강사를 하지, 왜 진로강사 양성과정에 지원을 했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돈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글쓰기를 싫어해서 강좌수가 점점 줄어들고 독서논술의 진입장벽은 너무 낮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올 해도 방학 내내 면접을 보고 3 강좌만 하고 있다.

그리고 늘 내 뇌세포를 활성화 시키는 아들의 존재. 아들이 평생 먹고 살아야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놓아야한다는 강박과, 아들과 둘이 있는 시간이 싫어서인지, 습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 저것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니 이제는 진짜 일이 좋아졌고, 나이에 대한 압박 때문에 무엇이든 배우고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일다운 일을 하지 못한 10여년의 세월에 대한 보상을 받기라도 하듯이 나는 이즈음 취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학습자 중에 미술치료 강사가 있었다. 수업을 맡은 진로강사는 이 샘에게 2시간의 시간을 줄 테니 강의를 해 보라고 제안했다. 

미술치료에 트라우마가 있던 나는 당최 집중을 할 수 없었지만 다년간 몸에 밴 습관으로 인해 강사의 질문까지 맞추게 되었다. 

“여러분, 공감이 무엇인가요?”

상대방의 말에 같은 마음이 드는 것, 끄덕이는 제스처, 눈을 맞추는 것… 등 다양한 답이 나왔고,

나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강사가 원하는 대답을 했다. 

이 대답은 수많은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배운 게 아니다. 

15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살려고 애썼기 때문이다. 스님이 수양을 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는 상담학에서 배우는 모든 언어들을 몸으로 습득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다.

답변에 대한 상품도 받고 그런대로 평범한 진행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두 번째 활동에서 강사가 가면을 나누어주었고 가면 안쪽에는 감추고 싶은 나, 가면 겉에는 자랑스러운 나를 표현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화려한 색깔의 한지, 구슬, 스티커등으로 가면을 꾸미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꾸미 듯 화려하게, 예쁘게, 사랑스럽게.

그런데 나는 무얼 어떻게 꾸며야 할지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귀찮기도 하고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귀한 시간을 쪼개어 수업을 들으러 왔는데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마뜩지 않았다. 그래도 뭐, 대강 색도 칠하고 스티커도 붙이고 머리카락도 붙였지만 예쁘지는 않았다. 마치 내 과거를, 내 아픔을 홀라당 들킨 것 같아 찝찝했다. 아이섀도, 아이라이너, 립스틱으로 한껏 화장을 하고 사람들을 대하지만 내 마음은 늘 흑백이었던 것처럼, 차가운 돌덩이인 것처럼, 마스크가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이래서 나는 미술치료가 싫다.


그런데 강사는 ‘그 마스크를 쓰고 나를 화나게 했던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해주라는’ 미션을 주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하게 되었는데, 나는 최근에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화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 사람에게 넘겼고, 다른 사람들은 친구에게, 학부모에게, 시아버지에게 섭섭하고 서러운 소리를 했다. 다시 내 차례가 돌아왔고, 나는 조원들의 말을 들으며 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불편한 감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한테 일하느라 애들 교육을 못 시켰다고 했지? 우리 애 대안학교 보내라고 했지? 글 쓰는데 정신 팔려서 애한테 신경 안 쓴다고 했지? 그때 엄청 속상했어.”

수업이 마무리되었지만,  기분이 너무 거지 같았다. 똥 싸다가 그냥 나온 느낌?

너무 기분이 나빠서 속까지 메슥거렸다. 그래도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면지역의 초등학교에 수업을 가야 해서 40분을 운전을 하고 가면서 과거의 일이 떠올랐고 괴로웠다.


미친 미술치료…

나에게 미술치료는 늘 기억을 꺼내놓고 기억 속에 허우적거리는 상황만 제공했다. 끓인 라면이 바닥에 쏟아졌을 때, ‘저걸 어떻게 담지?’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영원히 빙하 속에 있는 게 맞다. 그걸 끄집어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이제는 상황 종료 된, 아니 어쩌면 휴화산일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행복하고 평온한 때, 10여 년 동안의 기억과 아픔 때문에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운전대를 쿵쿵 두드리며 욕을 해댔고, 화가 안 풀려 이 도시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 감정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침울하고 우울한 감정은 내 안의 간을 에워싸고 있는 기름덩어리처럼 내 심장을 옥죄었다.

다행히 독서논술 수업을 하면서 1시간 반 동안은 그 거지 같은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역시 아이들이 나를 구해준다.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내 안의 모든 죄를 씻어주는 느낌마저 든다. 

괜찮아요.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20년 전에 내 자식을 저렇게 사랑했다면, 온전한 눈빛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면 그 아이는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았을까? 내가 이렇게 다른 아이들에게 잘하면 내 죄책감이 씻어질까? 울컥, 감정이 밀려와서 아이들에게 비타민을 주고 서둘러 바이바이를 했다.

죄책감. 회한이 밀려온다. 

기억을 쏟아내는 게 맞을까? 빙하 속에 묻어놓는 게 맞을까?

한 시간의 미술치료로 나는 15년 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쓴다. 이제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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