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24-27주 차] 부모마음은 다 똑같다
늦은 밤 오랜만에 소중한 친구와 수다를 떨던 중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꼼꼼하고 똑 부러지는 내 친구는
여행과 공부, 일을 하며 바삐 사는데도 가끔씩 자신을 게으르다고 말할 때가 있다.
나는 꿈만 꿨던 여행지를 여러 곳 다니고, 내가 고민했던 워킹홀리데이도 캐나다로 훌쩍 떠났다 오고.
옆에서 보기엔 너무나 부지런하게 하고픈 일을 해내는 부러운 친구인데 말이다.
"아냐. 너처럼 똑 부러지게 부지런히 여행 다니고 일하고 공부도 잘 한 친구가 어딨어?
게으른 게 아냐. 겁이 많은 거야."
친구가 예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항상 모든 일에 최악을 먼저 생각해.'
어쩌면 쉽게 겁을 먹지만, 주춤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해내는 멋진 친구다.
그 친구 역시 내게 말했다.
"너도 그래. 넌 비겁하다고 얘기하지만, 확신이 필요한 거야."
그 말을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직관적이고 계획적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강하다 보니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머릿속으로 마인드맵을 그린다.
다양한 변수와 과정을 고려하여 미리 계획하여 보는 것.
그 후에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예상된다면 그제야 한 발 뗀다. 이러다 보니 종종 나 스스로를 비겁하다 말할 때가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도 용기가 없어서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이다.
- 입시, WEST 등 각종 대학 프로그램, 미주-유럽 여행, 워킹홀리데이 등
물론 위의 것들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탱자탱자 놀기만 한 건 아니다.
막판까지 정리하여 고심한 것들이 확인되면, 그때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실행하기 때문이다.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를 제대로 모르는데. 안다 하더라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데.
어쩌면 한 걸음 떨어져서 봐야 정확히 보일 때가 있다.
모든 마찬가지겠지. 엄마로서도.
자식일 때는 절대 모른다.
간혹 아이를 낳고 길러보지 않았으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는 이의 말을 들으면 이젠 웃음이 난다.
나 역시도 옛날에 그랬다.
나름 머리가 크고 성인이 되어선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조금 이해된다고 하였으나.
아이를 낳고 길러보니 깨달았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몰랐단 사실을.
나는 '나 자신'만 중요시 생각하며 살았고, 살면서 갖게 된 역할도 잘해보려 했다.
- 딸, 아내, 며느리, 회사원 등
이는 전부 '나 자신'이라는 가장 중요한 폴더에 속한 하위 개념이었다.
그 후에 아기를 가지면서 '엄마'의 역할이 그 아래 하나 추가될 뿐이라 생각했다. 바보 같게도.
'엄마'는 '나 자신'을 뛰어넘는 상위 폴더였다.
머리만 대면 깊이 곯아떨어지던 내가,
아이의 작은 뒤척임과 울음에도 번뜩 눈이 뜨이는 엄마로.
고3 때도 밤새지 않을 만큼 잠이 중요한 내가,
아픈 아이를 간호하면서 밤새는 건 일도 아닌 엄마로.
항상 내 몸과 건강이 중요하던 내가,
아이 앞에선 아픈 티도 내지 않고 웃으며 아이를 우스꽝스럽게 달래주는 엄마로.
나는 엄마가 되어서야 나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초월-하다'란 '어떤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는다'는 뜻에 동사이기도 하나.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그 바깥 또는 그 위에 위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중략)
실존 철학에서는 무자각적인 일상적 존재의 입장에서 철학적 자각의 입장으로 넘어서 나아가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엄마가 되어 엄마에 대해 글을 쓰는 지금.
실존 철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나' 역시 이를 증명하는 증거다.
20대 시절 자아도취와 불안이 뒤섞여서 때론 모든 걸 다 알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할 때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를 정확히 돌아보지 못한 평범한 존재였다.
하지만 엄마가 되면서 철학적 자각의 입장으로 넘어서 나아갔다.
아이를 돌보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나는 어떤 자식이었는가 반추한다.
아이가 밝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사랑을 얻을 때가 있다.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재.
나 역시도 그러했을 텐데.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언제나 나를 채찍질하며 뭐든 이뤄내려고 애쓰며 살았는데 왠지 그 모습을 지켜봤던 부모님은 속상하셨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