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다시 육아휴직에 들어간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다시 재개된 육아휴직 1주년(?)을 기념하며 오늘의 내 마음을 쏟아본다.
지난 4년간의 휴직과 올해의 휴직은 또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첫 육아휴직이 의무감이나 한 생명의 생존과 직결된 시간이었다면,
나의 두 번째 육아휴직은 내가 가진 엄마라는 정체성이 발현시킨 의지였고, 생존을 넘어 아이들과 나의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첫 번째 휴직엔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내 주된 감정이었던 것 같으나
두 번째 휴직에서의 가장 큰 빌런은 아이들도 남편도 아닌 바로 나 스스로이다.
이제 아이들은 스스로 먹고, 걷고, 친구를 사귀어 나갈 수 있는 정도가 되다 보니 엄마라는 나의 존재가 그 아이들의 생존의 필수요소는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아휴직을 결정한 나에겐 이 휴직에 대한 정당한 명분 같은 게 필요했다.
생존의 필수요소도 아니면서 돈도 안 벌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들어앉았으면,
아이들의 학습을 위해 무언가 대단한 열심과 아이디어를 내어야 할 것 같았고,
이 아이들의 성장과 건강을 위해 굉장한 식사를 제공해야 될 것 같은 중압감이 있었다.
아이들이 보이는 문제행동은 오롯이 나의 잘못인 것 같았고,
육아휴직까지 했으면서 그 정도도 챙기지 않고 뭘 하고 있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날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요구한 건, 남편도, 회사도 아니라 나라는 것이지만 말이다.
나는 이 집에서 참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식사, 청소, 빨래, 다림질 같은 생존과 관련된 것은 물론이고
이제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목표론 부족하게 느껴지는 7살, 6살의 아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고민과 결정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어쩌면 진짜 이젠 언제 끝날지 희미해져 버린 이 코로나 시국에서 아이들은 언제 등원이 중지될지 모르는 노릇이고,
거기에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이 집의 경제적인 부분도 신경 써야 하며,
회사에서 신랑이 모아 온 걱정이나 뒷담화거리도 들어주면서 신랑과의 우정도 계속 돈독하게 유지되게(?) 해야 하고,
우리 두 어린이들의 갈등 중재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수다 메이트도 되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없는 시간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난 괴로움에 사무치게 된다.
넌 오늘 뭘 했어,
이렇게 살 거야?
왜 나는 이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내모는 걸까.
난 그래서 요즘 엄마라는 이 자리가 너무 어렵고, 버겁기도 하고, 괴롭다.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를 덜 괴롭혔을까,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좀 더 좋아했을까,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나의 두 번째 육아휴직이다.
많은 고민 끝에 휴직을 연장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묻고, 고민한다.
누구를 위한 휴직이니
이 휴직이 의미가 있는 거니?
정말이지 나의 두 번째 휴직의 최대 빌런은,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