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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일기 Mar 12. 2024

런던에서 영국인들과 노래방을 가다

나름 성덕(?)이 된 팝송덕후 이야기

20일쯤 전부터 회식 후 노래방에 갈 예정이라는 공지가 있었다. 노래방이라고? 시내에서 인생네컷 포토샵이나 명량핫도그가 있는걸 보고 한국문화가 영국에도 많이 대중화되었구나 느꼈지만, 회식 후 노래방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파트너 중 한분은 노래방을 너무 좋아해서 집에 노래방 기계를 따로 두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오랜만에 사무실에 돌아오니 바로 그 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동안 다른데에 정신이 팔려있어 노래방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못했는데, 전혀 준비가 안된탓에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새로 온 직원이다보니 다들 지나가면서 "너 회식 올거지? 노래방도 올거지? 노래 뭐 부를거야?"라고 질문을 했는데, 극 I 성향인 내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외국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 앞이 깜깜해졌다. 


내 이런 긴장을 알아챘는지 보스가 "네가 불편하면 굳이 노래 안불러도 돼. 그리고 한국에서 노래방을 가면 노래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과는 달리, 여기에선 다들 노래를 너무 못하는데 또 너무 열심히 해서 거기서 재미를 느끼는 거니까, 전혀 부담갖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팝송을 그렇게 많이 듣고, 고등학교 야자시간엔 늘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팝송 가사만 외워대고 있었는데, 막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니 무슨 노래를 불러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코인노래방에 가는게 오래된 취미다. 다만, 매번 혼자 간다. 왜냐하면 정말 누군가의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쑥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한 상황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 가기 보다는 혼자서 코인노래방을 가는 것이 가장 즐겁다. 체질상 술은 한방울도 못마시지만, 코인노래방에 혼자 가서 맨정신으로도 몇시간을 신나게 보낸다.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을 가게 된다면 선곡부터 내 음정, 박자까지 신경써야 할일이 한두개가 아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내게 뭘 기대할 리도 없는데, 다른 일에서도 그렇듯 괜히 혼자 잘해야 할것 같다는 이상하게 설레발치는 마음이 앞서서 그런것 같다(이런 마음이 노력한다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뭘 어떻게 해야할지 미처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노래방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첫 관문부터 쉽지가 않았다. 노래방 입실 전 신분증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신분증이라곤 여권이랑 비자 뿐인데 나는 둘다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당황해서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핸드폰에 저장된 여권 사본이라도 있는지 찾고 있자니, 문지기 아저씨가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휴,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진 출처: 영국 Lucky Voice 홈페이지


우리는 큰 방에 안내되었다. 한국에서 코인노래방이 생기기 전 동네들에 많았던 노래방과 비슷했다. 다만 방 크기가 커서 나중에는 거의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번에 방 안에 있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을 때는 노래방에 오겠다고 했던 사람들 중에 안 온 사람들도 꽤 많아보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들도 노래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것 같아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 마음이란게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노래를 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어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노래를 예약하기 시작했다. 한국이나 여기나 인싸들은 역시 다르다. 다들 한 손엔 맥주나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나는 역시나 탄산수를 들었다). 그리고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분명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점점 떼창이 되더니 이후로는 누가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다들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었고, 소파에 올라가 방방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외국 가수가 내한을 왔을 때 관객들이 떼창을 하며 즐기는 모습과 흡사 비슷해보였다.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아싸 기질을 숨길수 없는 나는 처음엔 구석에서 잔뜩 긴장하고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백스트릿보이즈, 브리트니 스피어스, 마일리 사이러스, 비욘세, 오아시스 등등의 노래들이 나오자 일어서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있다보니 춤까지 추기엔 몸이 많이 굳어 있어서 적당히 엉덩이만 오른쪽 왼쪽으로 조금씩 왔다갔다 했다(직접 본 사람들 입장에선 그 모습이 좀 웃겼을것 같다). 대부분의 노래들이 나도 예전에 꽤나 즐겨 들었던 곡들이었고, 그 중 일부는 가사를 통째로 외우고 있는 것이어서 어느새 나도 큰소리로 떼창을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내가 정말 존경하는 보스는 비욘세의 "Crazy in Love"를 선곡했다. 그녀가 제이지 랩까지 하는 것을 본 나는 일, 가정 모두 완벽한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까지 완벽한 그녀를 더더욱 존경하게 되지 않을수 없었다. 


사실 내가 팝송에 집중적으로 빠졌던 시기는 1998년에서 2010년쯤까지여서, 그 때 내가 즐겨듣던 노래들은 너무 오래된 노래라 부르면 안되지 않을까 싶어 선곡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시기, 또는 오히려 그 이전 노래들 선곡이 많아서 정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너무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노래를 열심히 부르는 것을 본 사람들이 나를 앞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에이미 와인하우스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가운데 서서 Valerie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심지어 내가 선곡을 한적도 없다) 양 옆으로 이 구역의 인싸들이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미친듯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같이 부르고 있는데, 순간 내가 지금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싶었다. 정신차린 순간 도망가고 싶었지만 Valerie는 끝까지 부를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정신줄을 조금 놓고 다음 노래 떼창에 심취하고 있으려니, 몇몇 사람들이 내게 와서 서울에 방문했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같이 춤을 추자는 제스쳐를 하기도 했다. 나는 흥이 올라서 그 후로도 목이 터져라 같이 떼창을 하다가 또한번 무대 중앙으로 가서 내가 선곡한 Uptown girl을 불렀다. 고등학교때 워크맨으로 테이프가 늘어날 정도로 Westlife 앨범 전곡을 지겨울 때까지 듣고 또 들었었다. 그런데 이제 영국에서 그 때 그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신나게 놀고 나니 12시가 다된 시간이다. Tube가 끊길 것 같아서 보스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먼저 돌아왔다(그때까지도 노래 예약 리스트는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야자시간에 너무 공부가 하기 싫어서 외웠던 팝송들을 20년이 훌쩍 지나 런던에 와서 써먹다니... 물론 야자시간에 그러고 있었으니 당연히 수능시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오랜 팝송덕후로 산 끝에 성덕(?)이 된게 아닌가 싶다. 


다음날 회사에 갔더니 1달이 다되어가도록 내 이름을 못외우던 어느 직원이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첫 인사를 나누고도 인사를 한번도 나누지 않은 것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내게 인사를 건넸다. 오후에는 프린터기 사용을 잘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노래방에서 같이 떼창했던 어느 직원이 오더니 도와주기도 했다. 한달 가까이 몇명의 직원 빼고는 거의 말을 섞지 못하고 지냈는데... 한국이든 런던이든 사람 사는 곳은 결국 다 똑같구나 싶다. 이렇게 런던에서의 한주가 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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