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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nde>를 찬미하며

프랭크 오션과 칸예 그리고 무너지는 십프피 잡설

by 스눕피



위대함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아보느냐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좋은 것은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니까요.

Jon Brion



Ye's Favs


칸예 역시 한때 프랭크 오션에 푹 빠졌었다.


언젠가, 우리처럼.


"나랑 드레이크 둘 다 프랭크 오션 노랠 들어. 라디오는 이런 쩌는 아티스트들을 밀어줘야 한다고! 전 세계 모든 방송국들이 말이야.

그래야 세상이 좀 굴러갈 거 아니냐.

만약 라디오에서 찐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싹 다 모여서 니들이 제일 좋아하는 프랭크 오션 노래를 하나 골라.

그리고 하루에 최소 10번은 돌려. 알겠어?”

- Kanye


"뭐 없냐? 아, 있지. 당연히! 살려는 드릴게."


귀중한 공연 시간에 짬을 내어 다음 그래미 시상식에 프랭크 오션의 앨범이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하면, 당장 보이콧하겠다며 위협하던 오지라퍼 시절도 있었다.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앨범은 Blonde야. 지금 하나 분명히 해두자. 만약 그의 앨범이 어떤 부문에서도 후보에 오르지 못하면, 난 그래미에 절대 안 갈 거야. 우리 아티스트들은 뭉쳐서 이런 엿 같은 상황과 맞서 싸워야 돼.”

- Kanye


아무튼간에


오바는 지구 최고인 Ye 형,


그리고


그런 형을 거뜬히 비껴가는,


아무튼간에 만만찮게 대단한 형,


Frank 형.


"No Church in the Wild" 이후 칸예는 프랭크 오션에게 또 한 번의 앨범 피처링을 제안했지만, 보란 듯이 거절당했다.


어쩌면 칸예는 프랭크의 음악 속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with Jon Brion


2004년, 올드 칸예는 미셸 공드리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본 뒤, 오케스트라 배경 음악에 흠뻑 취해 음악 감독 존 브라이언에게 당장 연락했다.


곡 작업 좀 도와달라고.



칸예는 기존의 랩 프로덕션과 거리 두기를 원했고, 전례 없던 힙합 아티스트로서 자기 확장하고 싶어 했다.


존 브라이언은 칸예의 제안을 수락했다.


“힙합 음반은 평생 만들어본 적도 없는 저에게

칸예는 절반의 지휘권을 줬어요.

이게 자기밖에 모른다는 사람이 보여줄 행동은 아니죠.”

- Jon Brion


인디·얼터너티브 팝/록 장르의 세션 연주자이자 레코드 프로듀서 그리고 영화 음악가로 활약했기에 랩 작업은 처음이었지만, (다소 기묘했던) 둘의 협업은 빠르게 성과를 냈다.



첫 세션 작업은 불후의 명곡 Gold Digger였고, 이후 존 브라이언은 2005년 칸예 정규 2집 앨범 <Late Registration>의 16곡 중 11곡의 프로듀싱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다.


이 앨범, 구구절절 설명하려니 입만 아프겠네요.


존 브라이언은 세션 연주자들을 불러 훅을 강화했고, 풍성한 현악과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입혀 올드 칸예식 올뉴 힙합의 모험적인 고양감을 부풀렸다.


20인조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수록곡 “Celebration”은 개중 압권이었고 말이다.



이후 존 브라이언은 칸예의 <Graduation> 후속 실험을 거쳐, 내친김에 비욘세의 <Lemonade>, 프랭크 오션의 <Blonde> 그리고 맥 밀러의 <Swimming> 그리고 유작 앨범 <Circles> 참여까지 뻗어나가며 R&B와 힙합 세상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특히, <Blonde>에는 프로듀서이자 편곡자, 키보드 연주가이자 드럼 프로그래머로 참여해 "Pink + White"와 “Self Control”, “Nights"와 "Pretty Sweet" 그리고 “White Ferrari”의 정서적이고 음향적인 친밀감을 돋웠고, 수많은 감정 쓰나미 피해자를 양산했다.


전설의 레전드의 시작


살아 움직이는 세션 플레이와, 할리우드식 현악 그리고 풍성한 오케스트라 곡 장식으로 널리 알려진 존 브라이언은 <Blonde>에 참여하면서는, 반대로 과감히 곡을 비워내는 미니멀한 프로덕션을 선보였다.


프랭크 오션의 강렬한 감정적 보이스와 예술적인 노랫말을 세상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



제가 하는 어떤 작업이든

보컬이 최대한 크게 들리되,
따로 겉도는 것처럼
들리지는 않게 만들어요.

Jon Brion



Been There,

Done That.


팔불출 칸돌이로서 역성 들며 두둔해 보자면,


칸예가 현대 힙합 음악 역사에 분명한 길을 텄고, 후배들이 호들갑 떨며 벌이는 참신한 짓이라는 것들도 기실 칸예가 거진 다 이미 해본 것이라며 그를 막연히 추켜세우는 그 추앙의 말들, 그 말들은 사실 일리가 있다.


2016년, 칸예의 트럼프 지지로 엇갈린 둘은 멀어졌다.


"프랭크가 우리 집에 와서 줄줄 떠들더라고. 트럼프 지지하지 말라고. 쟤가 정치에 대해 뭘 알아? 책 몇 권 읽고 나를 훈계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한편 올해 초, KKK 차림을 한 미친 올뉴 칸예는 한 인터뷰를 통해, <Donda>의 수록곡 "Moon"의 발매와 함께 사실상 프랭크 오션의 커리어는 끝났다며 어그로를 끌었다.


<Blonde>, 아니, 프랭크 오션을 ‘힙합’의 우산 아래 두는 것이 합당한가에 관해선 입장 차이가 있지만, 프랭크 오션의 <Blonde> 제작에 도움을 준 44명의 기여자(비욘세, 안드레 3000, 퍼렐, 칸예 웨스트, 제임스 블레이크, 존 브라이언 등), 그 엄청난 이름들이 뿜어내는 집단적 에너지와 그의 탁월한 편집 능력은 앞서 언급한 칸예 정규 2집의 맨 파워(칸예는 그가 존경하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스튜디오로 초대해 웅대한 걸작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올드 칸예의 독창적인 큐레이션 센스와 닮아있다.


물론 프랭크 오션은 그 대단한 양반들을 다만 작품의 스태프 혹은 양념처럼 활용하고(무려 비욘세를 백보컬로 활용하며) 자기 서사 발산에 보다 집중하긴 했지만 말이다.


마치 온 우주의 에너지를 나에게로 죄다 몰아넣겠다는 듯이.


이 작품은 엄연히 내꺼니까.





Grammy


칸예의 오지랖이 무색하게도, 프랭크 오션은 그래미 측에 Blonde를 출품하지 않았다. 데뷔 초부터 이어진 주류 음악 산업에 대한 반항 정신과 제도 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단독 예술가로의 열망 그리고 그래미의 문화적 편향과 감수성 둔화에 대한 불만족은 그래미 작품 미등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예술 비전을 타협하지 않는 아티스트로서의 배짱과 이 세상에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작가의 자존과 품위 측면에서도 역시 프랭크 오션에게서 칸예가 겹쳐 보인다.




Blond(e)


스마트폰 시대의 소울 뮤직



<Blonde>의 정체성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독특한 질감의 사운드와 경이로운 멜로디, 텅 비어 황량한 분위기 속 내성적인 보컬의 매혹적인 깊이는 가슴 한 구석을 쿡쿡 찌른다.



더 예쁘게, 더 정갈하게 잘할 줄 알면서, 일부러 안 하는, 그것도 아주 못나게 만드는, 천재 뮤지션의 실험적인 판타지와 미학 추구는 반복 학습을 부르는 신비로움 그 자체다.


“어떤 코드와 멜로디의 조합이 내가 원하는 감정을 만들어낼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가 느껴야 할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죠.”

- Frank Ocean


<Blonde>의 팬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1번 트랙 Nikes의 차가운 리듬과 마치 가면을 뒤집어쓴 듯 바삭하게 튀겨진 피치 시프팅 보컬을 듣기 시작한다는 건 60분이 훌쩍 지나가는 몰입의 마법을 경험하고, 기어코 막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못난 의지의 표현이라는 걸.



쿨하고 나른한 미니멀 리듬, 사랑과 기억, 존재에 대한 흐리터분하지만 서정적인 내면 이야기와 즉흥적인 가사 그리고 명상적인 트랙 구조에 한번 취하면, 이건 뭐 답도 없다.


또르르.



모든 게 흐려지고,
우리는 늙어가.

여름은 예전 같지 않아.
미친 듯이 소중한 매일이야.

다시 너를 부르면
와줄 수 있을까?

from. Skyline To



Crying INFP


나 같은 불치의 십프피에게, 이 앨범이 선물하는 놀라운 효능은 프랭크 오션의 모든 말이 내 맘 같이 느껴져 당장 마음을 덥혀주고 세상을 바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더 예쁘고 소중하게, 이 세상을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을 자극한달까.



넌 가끔
네가 지나온 자리를
내려다보겠지만,

이곳은 언제나
네가 돌아올
집이 되어줄 거야.

from. Godspeed



지난주의 일본 여행 중에 <Blonde>를 몇 번이나 돌려 들은 지 모르겠다.


공항에서,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미술관에서,


축복처럼 황홀한 시간,


프랭크 오션의 자기 고백적이고 내밀한 서사가 곧 내 삶의 이야기가 되는 마법 같은 순간.


정말 행복했다.



올해도 신세 많이 졌습니다.



Inspiration


"2년 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한 아이의 이미지를 발견했다.

안전벨트가 그녀의 몸통을 가로질러 목까지 올라왔고,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카락은 잠시 동안 귀 뒤로 쓸어 넘겨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맑고 차분해 보였지만 공허하지는 않았고,

그녀 뒤의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 자신을 그녀의 자리에 두고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연출했다."

from. Frank's Tumblr



프랭크 오션은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Blonde>의 제작 영감이 되어 준 한 장의 사진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공간, 자동차의 안전벨트 아래 단단히 묶인 채 쏟아지는 어지러운 세상 풍경과 내면 성찰.


에어팟을 귀에 꽂고 <Blonde>를 재생할 때마다 우리가 느꼈던 당혹스러운 현장감과 공간감은 아마도 이러한 제작의 출발점으로부터 기인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지난주의 나처럼 차창에 바짝 달라붙어 생경한 세상과 호흡하는 여행자의 마음과 깊숙이 연결되는 초월적인 개인 음악 체험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Frank Ocean


정보를 아껴 내보내는 은둔의 예술인이자,


“마지못해 되어버렸다”라는 표현이 되게 웃픈 글로벌 팝스타,


그리고 스마트폰 세대의 메마른 감정과 내면을 주무르는 그래미 공인 마사지사,


프랭크 오션.


형!



그리고 그의 결코 질리지 않는,


아니, 질릴 수 없는 위대한 걸작 <Blonde>.



앨범이 발매된 건 2016년 8월 20일,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떠밀려 나온 게,


동년 동월 27일.


그러니까,


27살의 27일.


거진 10년이 흘렀네.


제발, 의미 부여 좀 그만해라!


아무튼간에 이런 간지는 우주 최강이지.


진심을 흐리지 않고,


정직하게,


부끄럼 하나 없이!


열심히 살았지만,


여전히 아등바등.


멋대가리 하나 없는 지루한 생활에 왈칵 지치다가도


언젠가 새하얀 미소로 화답할 핑크빛 세상의 따뜻한 포옹을 기대한다.


형, 황금 비율이야?



나의 20대와 30대,


그저 어떤 순간만이라도


덧없고 초라하지 않게,


영화 속처럼 아름답게 채색해 주는,


멋진 고급 예술 작품을 남겨주어서 감사합니다.


올해도 신세 많이 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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