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의 계절이 왔다.

봄바람 휘날리면 벚꽃 엔딩, 찬 바람 불 땐 나의 아저씨.

by 스눕피

얼마 전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다시 봤다. 이번이 두 번째 돌려 보기다. 박동훈(이선균) 부장이 양아치 건설회사 대표를 찾아가 형의 굴욕을 대신해 멋지게 복수하는 장면과 이지안(아이유)을 향해 에이스 침대처럼 편안함에 이르렀냐며 동굴 속 원시인의 소리를 내던 장면이 나올 때, 나는 정말이지 2004년을 빛낸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처럼 주먹을 먹으며 울고 싶었다. 만일 내가 주먹을 먹지 않고 그냥 엉엉 운다면 너무 큰 소리가 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저씨>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정서적으로 모질게 자극한다. 드라마 속 삼 형제의 우애와 갈등은 남 일 같지 않고, 악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따뜻한 이선균의 마음씨는 현실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든든한 가족처럼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후계동 주민들의 따뜻한 인심은 그저 부러울 뿐이고, 대학 후배 출신 상사 새끼와 같은 대학 출신 아내의 불륜에 괴로워하는 이선균의 술잔과 취기는 상식적인 우리의 멘탈을 작살낸다.

<나의 아저씨>를 대한민국 지식의 대가인 N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았다. <나의 아저씨> 속 남성관, 여성관을 문제 삼거나 지나친 폭력성을 지적하는 어떤 사람들과 쉽게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존중을 취향하고, 각기 다른 가치관과 개성을 이해할 줄 아는 겸손하고 때로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뭐,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나도 불평깨나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불평과 불만 나아가 비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인정하게 만들 수 있는 <나의 아저씨>의 매력이 나는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완전한 몰입을 이끌어내는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분위기를 메이킹하는 분위기 메이커라는 표현이 좋겠다), 둘째, 훌륭한 문학 작품 속에 들어앉아있는 필사하고 싶은 구절처럼 적재적소에서 꽃피는 가슴에 와 닿는 대사들, 셋째, 촘촘하게 짜인 극의 구성까지(사실 이 드라마를 확실히 이끌어 나가면서도 '비현실적'이라는 형용과 함께 제대로 발목 잡는 것이 '도청'이라는 설정이다. 마치 이선균이 스마트폰의 수화기를 입에 대고 매일을 살아가는 듯 청명하고 깔끔한 환상의 도청 시스템은 지나치게 우수하긴 하다).

며칠 전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다가 옆 테이블에 앉은 가족의 대화를 우연히(몰래) 듣게 되었다. '이선균'이 아닌 '박동훈'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두 딸과 아내에게 <나의 아저씨>에 대해 구구절절 떠들던 40대 후반의 아버지를 그토록 흥분하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혹시 박동훈 부장의 깊은 한숨과 쉴 틈 없이 채워지는 술잔 속에서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본 건 아니었을까.


"나도 무릎 꿇은 적 있어. 뺨도 맞고 욕도 먹고. 그 와중에 다행이다 싶은 건 우리 가족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

아무렇지 않은 척 먹을 거 사들고 집으로 갔어. 우리 식구만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월 오륙백을 벌어도 늘 지겨운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가는 성실한 무기징역수 박동훈 부장의 아픔 그리고 장애를 가진 할머니를 모시며 꾸역꾸역 악에 받친 알바몬 인생을 살아가는 이지안의 아픔은 어디가 같고 또 어디가 다른 걸까. 둘은 정작 본인들의 상처로부터는 눈을 비낀 채로 상대의 종류가 다른 아픔을 위로한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이 아름다운 광경!

드라마를 한번 더 보려고 한다. 내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보통 반년이면 스트레스가 꽤 쌓이고 여러 종류의 아픔이 생성되긴 하던데...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음, 세 번째 돌려 보기가 될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