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myself가 아니라 myselves로 정의되는 사회가 온다
나를 나로 만들어 주는 것?
질문의 답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내>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자아를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흔하지만 어려운 질문이긴 하다. 막장 아침 드라마의 단골 대사마저 '나 다운 게 뭔데요?'니까.
본디 사회적 동물로 태어나 사회에서 최소 1인분의 몫은 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인류에게는 <페르소나>가 자동으로 탑재되어 있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만다라를 심리치료 목적으로 제안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이 고안한 개념이며 사회에서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이라는 의미다. 당신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 밖에서 타인과 문제없이 어울리기 위해 혼자 있을 때의 인격과 다른 결의 인격을 꺼내는 것이 다른 페르소나가 발현된 것이다.
<페르소나>를 심리학 용어로 가져온 칼 구스타브 융은 심리학의 거장인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지목받을 정도로 그와 양대산맥을 이룬 심리학자다. 하지만 둘은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는 않았는데, 특히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대립되었다.
그에게 무의식은 의식의 산물이었으며, 일종의 의식이 폐기한 모든 것들이 쌓여 남아있는 창고였다.
그런데 나에게 무의식은 이미 자율적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성격을 지닌 의식의 모체, 기초였다.
(칼 구스타브 융, Transformation and Symbols of the Libido (Wandlungen und Symbole der Libido))
실제로 융은, 이후 4년간 무의식의 영역을 깊이 체험하는 탐구를 했으며 그만큼 무의식과 의식의 영역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던 인물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는 사람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지되, 페르소나의 영역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자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이론에서 자아는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주체이지만, 페르소나는 외부 세계의 규범을 지키기 위해 본성을 감추는 가면이기 때문이다.
뭐지, 저 한국어 같은데 해석이 안 되는 문장은?
그래서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인터넷에서 유명한 이 사진을 가지고 왔다.
여기서 '아아앜하고 열람실에서 도망가버리는 것'은 글쓴이의 내부 본성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상상만 했을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열람실에서 조용히 연필을 사각거리면서 공부를 했겠지. 머릿속으로는 이상한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로는 열람실에서 공부를 한 것은 글쓴이의 페르소나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보라는 익명의 댓글에 추천수가 387개나 달린 것처럼, 열람실에서 아아앜하고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는 것은 사회에서 허용되는 행위의 범주 밖에 있는 행동이므로 글쓴이의 내부 본성대로 행동한다면 사회에서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페르소나는, 본성을 억제하므로
무조건적으로 자아의 어두운 면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에게 요구되는 역할의 범위와 다양성이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점차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해서 가상현실 (대표적으로 개인 sns 같은 온라인 세계 따위들)까지 이르기까지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졌다. 이에 따라 하나의 개인에게 더욱 다양한 인격, 페르소나'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본인의 선택이든, 아니든 말이다.
본디 페르소나의 정의란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하며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가면이다. 이틀 전 참여한 브런치 공모전에서는 개인이 여러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방구석 여포로 예를 들었지만, 당장 당신이 직장에서 가지는 인격, 집에서 가지는 인격, 개인 sns나 인터넷 댓글창에서의 인격들을 생각해봐도 한 인간이 여러 인격체/페르소나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올 것이다. 따라서 개인에게 하나의 페르소나만을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이렇듯 상황과 장소의 다양화가 개인 역할을 다양성 또한 요구함에 따라 한 개인의 인격, 즉 페르소나가 여러 개로 분리되는 것을 <멀티 페르소나>라고 한다.
즉, 멀티 페르소나는 자아의 분리이다. 그렇다면 '자아분열'도 멀티 페르소나의 범주일까? 자아의 '분리'와 '분열'은 확연히 다르며 둘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멀티 페르소나에서 인격이 여러 개로 '분리'된다는 것은 역할적 수행을 위한 '분리'를 말한다. 마치 공장에서 기계를 잘 가동하기 위하여 각 기계의 쓰임새에 따라 같은 부품을 사용하지 않고, 서로 상응하는 부품들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각 인격들을 올바른 상황들에 맞게 꺼내 쓰려면 역할에 따른 페르소나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즉, <자아>를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 역할에 맞는 인격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들이 나뉜다면, 이는 자아가 없는 상태이며 이것이 '자아분열'이다.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계속 페르소나로서의 가면을 쓴다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아의 다원화가 요구됨에 따라 <진정한 나의 자아>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는 현대인들이 많다. 단일화된 페르소나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본성과 본성을 가리는 가면의 존재인 페르소나가 공존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자아와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여러 페르소나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심리학에서 본성을 나타내는 용어를 셀프(self)라고 한다. 더불어 멀티 페르소나를 이야기할 때 이젠 myself가 아니라 myselves의 시대라고들 한다. 앞으로의 사회를 잘 살아가고, <나>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개의 다양한 인격이 존재하여금 <니> 또한 존재하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