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되는 문장들을 읽고 나누는 커뮤니티 들불
박완서가 불행을 말하는 방법
노혜지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기 시작할 때면 늘 이게 다 무어냐싶다. 우리 세대가 읽기에 박완서의 글은 제주 방언을 읽는 것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난감하다. 전쟁을 겪은 세대의 표현이란 대체로 이런걸까 하다가도 이와 대척점에 오도카니 선 젊은 세대의 말투도 비슷하게 적어 놓았으니 그저 편하게 읽히고자 본인 세대의 통속적인 표현들을 가져온 것이구나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조금 더 읽다보면 처음엔 진땀을 빼던 문장들도 어느새 눈에 익고,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박완서의 세계에 녹아든다. 박완서의 세계는 이처럼 멀다가도 금세 가까워진다.
‘이별의 김포공항‘에 실린 단편들의 주인공들은 불행 배틀에서 우승 후보에도 못 들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삶은 대체로 평범하거나 과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쉽게 행복이라 여기니, 불행 축에도 끼워주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분투한다. 그것이 그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불행을 묘사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활용될 뿐인 남성들은 평범하고 한심하며 징그럽다. 이들은 그저 주인공이 앉은 자리가 주인공과 얼마나 맞지 않는 자리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데도 왠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가 불행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상황에 이입하게 만든다.
단편의 화자들은 ‘보여지는 행복의 세계‘와 ‘감춰진 내면의 불행’ 그 중간쯤에 서있다. 이 둘을 팽팽하게 이어주며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는 ‘과거‘다. 그들의 과거는 현재의 그들을 존재하게 했지만 그들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서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박완서의 글은 매력적이다. 현재의 나는 그저 현재로만 존재할 수 없음을, 과거와의 지긋지긋한 연결고리를 묘사함으로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투쟁을 하고, 어느 정도는 성공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과거와 현재 모두에 발목이 잡혀 그저 부끄러워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일 뿐이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징그러운 현재(남편, 조카, 자식)에 갇혀 사는 신세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화자의 처지와 상황의 모순, 그리고 그들의 깊은 슬픔을 비로소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 말을 절로 뱉게 된다. 아아, 아아, 징그럽다 징그러워.
괴로움에서 수영하기: 길티에서 플레저로
서정민주
0. 혹자는 이 글의 제목에 반감을 품을 수도 있다. 팍팍한 일상에 조금의 달콤함이라도 주지 못할지언정 괴로움을 주는 책이라니? 괴로움을 온몸에 흠뻑 적셔가며 수영하는 건 대체 어떤 모습일까.
박완서는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에서 나와 타인의 끔찍한 내면(어떤 인물은 외면까지도 그렇다)을 치밀하게 들춰낸다. 대부분 여성 화자가 지질하고 속물적이며 이기적인 주변 남성 인물의 상태를 담담하고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는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여성 화자들이 자신의 지위나 상황을 그리 부풀리지 않을 만큼 현실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상을 뒤집는 혁명가는 되지 못할지라도 위선적인 세상, 그 세상에 복무하는 가부장, 그 속에서 답답한 나를 인식하고 묘사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위를 차라리 둥둥 떠다니고 깊숙이 다이빙한다. 이 과정에서 어딘가 모자란 주변인에 관한 표현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공감과 재미를 주기도 하고, '길티'스러운 특성들이 '플레저'하게 묘사돼 가부장제에 지친 사람들에게 길티-플레저를 선사한다.
[... 삼촌은 나는 외로운 놈입니다, 나는 불쌍한 놈입니다, 아무도 내 마음은 모릅니다, 하고 연극 대사 같은 독백을 하고 소녀는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사파전은 누가 누구하고 어떻게 편을 짠 싸움인지 켯속이 도무지 아리송하다.]-14p. '이별의 김포공항' 중.
[이태우 선생은 궁둥이를 들며 얼마 멀지 않은 자릴 턱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중년에서 노년에 걸친 허술한 남자들이 댓 명 이쪽을 보고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 그가 그쪽 자리로 옮겨 가자 일제히들 길길길길길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길길길은 욕의 찌꺼기가 아니라 누추한 색정의 찌꺼기 같은 거였다. 나는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이 불쾌했다.]-46p. '지렁이 울음소리' 중.
1. 이별의 김포공항, 노파
노파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소설에 나온 그대로 지칭하는 이유는 이 여성 노인이 가부장제가 선사한 산전수전을 다 겪고 후대 여성들에게 그것을 대물림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가사 노동과 육아에 치여 이렇다 할 사회 경험을 해보지 못했고 서울 구경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나, 노년을 미국에서 보내게 된 노파. 외국에 나가 있는 여러 자식들 중에 여러 명인 아들보다 딸 한 명이 초청한 것이지만 아들 딱한 줄만 알고, 며느리는 미워하고 손녀에겐 아쉬운 소리를 한다. 형제간, 고부간 갈등에서 드러난 가부장제의 '지루한' 디테일이 언젠가의 일상이나 주말연속극을 보는 듯해서 아찔하다.
이런 뻔한 갈등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산 채로 자기의 시신을 볼 수 있는 그런 끔찍한 불행을 겪은' 노파의 울음소리다. 끔찍한 땅을 떠날 때의 끔찍한 심정을 묘사한 부분이 너무나도 새롭고 아프다.
2. 지렁이 울음소리, 나(숙이)
이 단편이 제일 마음에 드는 이유는 세 사람 때문이다. 징그러운 중산층의 표상인 남편, 권태 속에서 더 나은 다름을 추구하는 숙, 과거 숙에게 불만이라는 감정을 심어줬지만 변해버린 욕쟁이.
남편의 끔찍함은 이야기 초반부터 세게 다가온다. 텔레비전 시청과 군것질을 즐기는 남편. 가치관과 행동의 일치가 그럼 그렇지 싶으면서, 읽기 껄끄러우면서, 너무 우습다. 그래서 재밌는 거겠지만.
그리고 나. 너무나도 안정적인 일상에서 권태로움을 느끼고 불만이라는 감각을 알려준 사람인 욕쟁이 선생님을 만나 그의 입에서 다시 욕이 나오기를 부추긴다. 평소 불안에서 오는 불안을 주로 소화하던 찰나에 읽은 이 단편에서, 권태에 의한 불안에도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숙이가 일탈을 넘어서는 행위를 하진 않지만 세상만사에 대해 무언가 잘못됐다며 질문하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욕쟁이 선생님은, 그의 '변절'과 실제 말투 그리고 편지 말투는, 그 자체로 소름 끼치는 즐거움이다. 야망과 신념을 품었었으나 힘없이 꺾인 남성(들)의 모습에 구역질과 엷은 웃음이 동시에 난다. 그의 말을 읽고 있자면 70년대 서울 말투를 체득하고 싶다는 장난 어린 욕구가 떠오르기도 한다.
3. 카메라와 워커, 나와 훈이
전쟁통에 사망한 오빠 부부의 아들, 그러니까 조카 훈이를 자식만큼 사랑하고 위한다고 생각하는 '나'와 속을 알 수 없는 사회 초년생 '훈'의 이야기다. 이 단편에서 맘에 들었던 부분은 두 가지다. 먼저 '더럽고 치사한 공상에 실컷 탐닉'하는 나의 모습이다. 나를 자기 내면과 옳은 가치에 대해 객관화하고 통달한 인물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불안증에서 비롯한 망상과 소망을 치사하다고 감지하는 모습이 좋았다. 공상을 실컷 탐닉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무슨 감정인지 잘 몰랐던 그것에 더럽고 치사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독자로서 상쾌했다. 비록 완전히 떳떳한 감정은 아니지만 말이다.
둘째는 훈이의 성장기와 강원도에서의 노동 환경을 삽화처럼 묘사한 것이 맘에 든다. 책을 읽는 동안 코 주변에서 훈이의 썩은 작업복 냄새가 나는 듯했다. 취준생과 정규직 그 사이에 끼어있고 고생을 하지 않으면 돌아갈 곳도 없는 처지의 훈이는 왜 한 세기가 새로 시작한 지금 더 많아진 것 같을까.
4.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나와 남편들
부끄러움에 관해 생각하는 '나'는 삼혼을 한 중년의 여성이지만 정작 이 여러 번의 결혼이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이후로 세 명의 남편을 만난 화자에게 희미해진 건 웃기지도 않는 정절에 관한 의식이 아니라 부끄러운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소설가는 주인공과 그를 에워싼 여자 친구들, 남편들의 속물적인 반응을 통해 주인공의 감각을 계속해서 깨우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 겉보기에는 가장 부끄럽게, 머리를 볶고 가슴을 드러낸 어머니를 통해, 창피함도 원망도 아닌 어떤 감정을 느끼게끔 한다.
5. 나가며
이 소설집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험한 바다에 모세의 기적 같은 지름길을 내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괴로움의 잔치에서 유유히 떠다닐 수 있게 수영법을 가르쳐주거나 구명조끼를 대여해 주는 역할로 설명하고 싶다.
50년 정도 지난 지금의 사회상을 지나치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도 유효한 고민거리가 있어 숨이 막힐 수 있다. 박완서는 이런 우리에게 소설 밖에서 쓸 수 있는 튜브를 또 던져준다. 길티가 가득한 세상, 그 길티를 치열하게 기록해서 어휴 그래, 그런 놈도, 그런 경우도 있지, 웃긴다, 하는 플레저를 만들 것. 현실을 진지하게 또 유쾌하게 곱씹을 때, 우리의 일상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거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