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되는 문장들을 읽고 나누는 커뮤니티 들불
*이번 리뷰는 두 편의 감상문과 한 편의 플래시 픽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혜지의 리뷰
가끔 내게도 수호신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운이 좋았던 편에 속하지만, 문득 나에게 닥칠지 모를 위험천만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할 때면 종교가 없는 나조차도 간절하게 수호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상은 늘 나를 초라하게 만들면서 끝이 난다. 위험한 상황에 놓인 나 같은 여성이 기댈 곳이란 고작 상상 속 존재 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구병모의 소설을 읽으며 처음에 나는 작가의 소망, 그러니까 문신이 살아나서 나를 지켜줄거라는 조금은 허무맹랑한 마음에 공감했다. 타투 하나 없이 매끈한 내 팔을 괜히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그래 타투가 살아나서 날 지켜준다면 그것도 참 좋겠다하고 결국은 또 나를 초라하게 만들 상상을 했고 잠시간 꽤 즐거웠다. 하지만 그건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보다 타투의 기묘한 힘으로 가해자가 죽었다는 짜릿한 서사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가능한 즐거움이었다. 피해자의 괴로움이 단지 가해자가 죽는 시점에 돌연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물론 그들에게 괴로움만 남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가 사라진 세상에 남게 된, ‘자신의 존재가 세상 누구보다도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남아 있는’ 그들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실재의 불꽃은 꺼졌지만, 심지마저 다 타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자리에 불씨는 이제 막 지펴졌을 뿐이므로.”
사람들은 폭력과 공포의 상황에 놓이면 누구도 믿지 못한다. 타인도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이러한 현실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고립시킨다. 화인과 M씨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던 그들의 마음은 타투에 고스란히 담겼다. 나처럼 수호신을 바라는 마음에서 한 타투는 아니었을테다. 그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타투에 담았을 뿐이었다. 뜻하지 않은 타투의 도움 앞에서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폭력의 상황에서 늘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존재, 어떤 형상이 되어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타투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실체가 있는 존재에게 도움을 받으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타투가 나를 지켜준다는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핵심을 놓쳐서는 안된다. 바로 인간이 인간을 위하고 돕는 일이다. 소설 속 상상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는 일, 인간이 누군가에게 소설 속 타투에 다름없는 존재가 되는 일.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 주어진 몫이 아닐까.
유정의 리뷰
'제일 절박한 순간', '이러다 죽을 것 같을 때' 약자를 구원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무엇이어야 할까. 구병모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 편의 휘몰아치는 영화를 본 듯하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역시 시공간을 넘나드는 구성과 비일상적인 사건들이 몰입감을 배로 높이는데 가볍게 넘어가는 책장에 비해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나는 관찰자인 시미의 시선을 따라가며 분노하고, 슬퍼하고, 더 용기를 내어 살기로 다짐했다. 작가가 날카롭게 현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면서도 결국 위로와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좋았다.
의문을 남긴 채 죽어버린 세 남자는 생전 약자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일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딸을 때리는 아버지부터 스토킹하던 여성을 감금한 K, 습관적으로 부하 직원을 괴롭히는 사장까지 현실에도 만연해있는 여러 형태의 폭력이다. 왜 늘 맞고, 조롱당하고, 죽는 건 여성일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걸까, 꼭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하는 것일까 생각하니 슬펐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뒤로 갈수록 사건과 인물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마저도 현실로 돌아오면 소설 속 인물이고 뭐고 죽고 없겠지하는 생각에 다시 공허해지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약자들이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지켜줄 존재가 없는 현실 속에서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서로를 향한 관심과 용기뿐인 것 같다. 몇 년 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얼굴도 모르는 혜지님께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문신술사 앞에서 쭈뼜거리던 시미처럼, 하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오프라인 독서모임에 참여했는데 왠걸, 처음보는 여성들과 고통을 나누고 함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끈끈한 연대를 경험한 것이다. 바닥까지 떨어졌다 생각했을 때 느꼈던 묘한 해방감, 그리고 세상을 향해 소리칠 용기, 각성의 시간들이 따라왔다. ‘사람을 지켜준다는 행위가 반드시 누군가를 해함으로써 완성되는 게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을 지지하는 버팀목 같은 것도 포함하는 것’ (p.131) 이라는 말에 공감했다. 그 정도만 있어도 살아지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지지 말자고 함께 걸어가자고 현실 속 모든 시미와 화인에게 제때 힘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민주의 플래시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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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딸이 둘 있다. 민주와 버디. 민주를 낳은 지 27년이 됐고 버디가 우리 집에 산지도 벌써 15년이 넘었다. 언제든 걱정도 없고 맛난 밥만 있다면야 뒤끝이 없는 막내둥이 버디를 제치고 장녀 민주로 말할 것 같으면, 첫인상이 강렬한 아이였다. 출산 직후 나 자신이 몸이라는 덩어리가 아니라 공기 속에 흩어진 산산조각으로 느껴질 때 처음 본 민주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혀를 쏙 내민, 메롱 하는 표정이었다. 그 맹랑한 표정을 보고 나는 사르르 녹아서 다시 사람 한 명으로 뭉쳐질 수 있었다.
민주를 너무 사랑해서 내 이름도 민주가 됐다. 여보에서 민주 엄마로, 원장 선생님에서 민주 어머님으로, 새 아가에서 민주 애미가 됐다. 식당에 예약을 할 때나 문화센터에서 동화구연 수업 따위에 대기 명부를 작성할 때도 항상 민주 이름이었다. 촌스러운 내 이름이 싫었다. 오빠와 남동생 이름처럼 원래 돌림자를 썼는데, 자라면서 건강을 해치는 고얀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쟁이의 말에 뜬금없이 촌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고향에서 남편을 따라 이사 온 서울 근교에서 민주는 백화점 지하에서 항상 구슬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야 하고, 문화센터가 있는 10층에 내릴 즈음엔 엘리베이터 바닥에 그걸 다 쏟아버리는 울보였다가 남동생이 걸음마를 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태어났을 때 표정처럼 당돌한 질문을 던지는 어린이로 자랐다.
엄마 이름은 부자잖아. 왜 자꾸 내 이름을 말해? 엄마는 엄마인 게 좋지 않아?
이후 민주는 빠르게 성장해서 의젓하고 야무지고 조숙했다가, 사춘기였다가……. 어째 계속 사춘기인 것 같다. 불만이 많다. 똑똑한 아이니까 없는 말을 하진 않겠지만, 최근엔 뭐랄까. 구체적으로 불만이 많았다가 이삼 년 사이에는 입을 꾹 닫는 모양새다. 부모에게, 특히 남편에게 온갖 지적을 한다. 우리 가족은 항상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내게 메롱을 날리듯, 딸애는 대화가 조금 진행되면 한숨을 쉬거나 입을 꾹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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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랑 타투하러 가자.
타투가 뭐야. 설마 문신이야?
역시나 엄마는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타투를 새겨야 하는지 설명하려던 찰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다시 데려온 스타 Y의 노래가 엄마의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온다. 눈물을 멈추리라 나의 사랑... 엄마는 Y의 앨범을 한 달째 반복 재생하면서 집 안을 산책한다. 몇 년 새에 살이 갑자기 쪘다가 다시 푸우욱 빠져버린 엄마는 한때 운동이 취미였다. 초등학생 때 매 년 mp3 플레이어를 새로 사줬던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서랍 속에 묵혀뒀던 아이리버 목걸이 mp3에 미디엄 템포 발라드 가요를 다 옮겨 두고, 동네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그의 독창적인 손짓과 스텝은 당연히 행인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엄마는 하나도 상관하지 않았다. 학원 원장이었다가 주부였다가, 경력과는 상관없는 어떤 일을 하러 강남으로 출근하게 됐을 때 퇴근하고 몇 시가 됐든지 간에 엄마는 운동장을 돌았다. 엄지 손가락을 잡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내 성격을 아는데도 눈 감고 10초 만에 엄지 손가락을 빼는 엄마여도, 매년 학급 반장으로 선출되면 햄버거 돌려야 되잖아, 라는 말로 축하를 대신하는 엄마여도 괜찮았다. 일단 멋진 몸짓을 가진 사람이니까. 다시 자기 이름을 쓰고 이직도 하고 높은 직책까지 올랐을 때 엄마는 커졌다가 작아졌다. 바람이 푸슉 빠지는 것처럼. 엄마와 아빠는 이제 조금 늙고 약해져서 나는 싸울 일이 있으면 입을 다물고 만다. 이제는 방을 도는 엄마에게 한 마디 덧붙인다.
내 친구 은이 알지. 왜, 엄마가 이름은 잘 기억 못 해서 얼굴에 피어싱 많이 한 예쁜 애라고 부르는 친구.
응, 그 친구가 왜.
은이가 배에다 타투를 했는데 좀 괜찮더라고?
뭐가 괜찮아. 피부병 걸려. 날라리 같아.
은이 날라리 아닌데? 엄마 걔 좋아하잖아. 이 타투샵은 가면 말이야, 어, 아로마 세러피처럼 진정 효과도 있고, 그림에서 느껴지는 뭔가 신묘한 게 있다니까. 꼭 나를 지켜줄 것처럼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야, 무서운 게 뭐가 있어? 너처럼 대차고 할 말 다 하는 애가.
할 말은 다 하지. 하고 싶지 않았던 말도 한 적이 많다.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게 인생이라는 걸 안다. 할 말 다 했을 때 엄마가 받아들이지 않은 적도 많지만 그 말만은 꼭 받아들여줬으면 했는데. 내가 어학연수하고 돌아왔을 때. 엄마는 타지 가서 밥 잘 못 챙겨 먹고 고생하는 게 딱하다고 했지만 더 딱한 일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엄마의 눈동자는 아주 잠깐 평소보다 더 커지더니 원래대로 돌아왔고, 원래와는 다른 쇳소리로 웃으면서 속사포처럼 말했다. 여자로 살면 그런 일 당하는 경우 많아. 거기에다 대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대답을 못한 건 당연했다.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어도, 나 여기서 상처 입은 채로 서있잖아. 나만 이렇다고 한 거 아니잖아. 나 좀 지켜주고 위로해줘….
모래처럼 느껴지는 밥을 입에다 욱여넣고 대학을 마저 다니고 밥맛도 술맛도 다시 너무 좋아졌을 때쯤 엄마는 너무 약해져 있었고 나는 화낼 수 없었다. 엄마가 미웠지만 미워하는 일도 꽤 피곤했으므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싶었다. 이 년쯤 속 얘기를 하지 않다가 내 생일을 맞았고 같이 타투를 하러 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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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 생일날 이런 편지를 읽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타투를 받으러 가고 싶어 졌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멋진 걸로 하나 때려 박아! 하니까 심드렁하게 오버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엄마, 여기서 타투하면 우리가 힘든 일 겪었을 때 타투가 우리 지켜준대.
낭설이다. 장삿속이야.
에이 참. 하기로 한 마당에 왜 그래. 다 믿을만한 소식통에서 들은 거야. 엄마는 어떤 도안으로 하고 싶어?
도안이라... 네 이름 아니면 버디 얼굴 할래.
민주는 의외라는듯 고개를 갸웃한다. 존재만으로 날 충만하게 하는 건 당연 내 딸이지. 또 하나 귀여운 그림을 한다면 왕왕 짖는 우리 개가 좋지 않을까. 버디는 순해서 잘 짖진 않았지만 커가면서 음식을 안 주면 깡깡 잘 짖는 개가 됐다. 약해지는 모습이 꼭 나 같아서 마음이 좋진 않지만 여전히 15년 전에 우리 집에 처음 온 그 날처럼 맑고 동그랗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찾아온 녀석들. 녀석들만 좋다면 몸에 내 이름이나 그림으로 타투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투르지만 언제 까지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다. 뭔가 결심한 듯 대화 좀 많이 나누자던 민주는 아픈 줄도 모르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각자의 팔에는 상처가 나고 색이 스미고 있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어루만지지 못했던 우리의 상처를 생각한다.
버디의 이야기는 추후 단편소설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