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가던 날

by 박신호

‘순례’는 설레는 말이다. 언젠가 TV로 보았던 티베트 불자들의 순례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삼보일배하면서 걷는 그들의 순례는 불가사의였다. 성산(聖山) 카알리스 산자락을 애벌레처럼 기어가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대체 신앙이 무엇이길래 저런 것이 가능한가 싶었다.

퇴직 후, 나 홀로의 순례를 꿈꾼다. 일단 배낭을 걸치고 집을 나설 것이다. 갈 곳은 많다. 섬진강, 다도해 섬, 제주 올레길 등 세상의 길들이 나뭇가지처럼 퍼져있다. 걸음을 내딛으면서 대자연에 서려 있는 신령한 기운을 느낄 것이다. 동행이 없어도 좋다. 순례는 외로워야 제격이니까.


유채꽃이 만발하던 날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 내가 속한 가르멜 재속회는 매년 짧은 순례 행사를 갖는다. 세례를 받은 지 삼십 년이 넘었지만, 순례를 다녔던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불교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적멸보궁과 같은 사찰 순례를 많이 했으니 이 또한 희한한 일이다. MB정부 때는 새만금과 한강, 영산강 등을 거닐면서 생명 살리기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이번 성지 순례지는 목포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이었다. 그곳에 대한 풍문은 작년에 처음 들었다. 바티칸교황청의 상징물이 부착된 준대성전, 명동성당보다 윗급이라고 했다. 대도시가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 건립된 큰 성전이란 말에 한 번은 들려보고 싶었다.

순례 가는 날 아침, 급한 마음에 달걀을 먹다가 소금을 그릇째 엎고 말았다. 서두른 탓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하다는 메모만 남기고 집을 나서야 했다. 다행히 휴일 아침의 도로는 한적했고, 신호등도 푸른빛으로 협조를 해주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이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금을 정리하고 나올 걸, 아내에게 미안했다.

9시 정각에 일행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도로에 깔린 옅은 안개를 헤치고 버스는 달렸다. 그날 내게 주어진 임무는 2호차 버스 인원 파악이었다.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만에 목포에 들어섰다. 산정동 성당에 도착해 보니 연무가 사라지고 없었다. 풍문대로 산정동 준대성전은 명칭에 걸맞게 우람했다. 건물 입구 위에는 ‘가톨릭목포성지’라는 금빛 글씨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종교 건축물에 대한 반감이 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파밀리아 성당을 영상으로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미학적인 경외심일 뿐, 신앙과는 상관없다. 예전에 가야산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의 동상을 올려다보다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윗동네 수령 동지라 불리는 거대한 조형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종교건축은 목포 청계면에 자리한 디아코니아 자매회 예배실이었다. 언님이라 불리는 개신교 수녀들이 머무는 독특한 신앙공동체였다. 그곳 기도실 겸 예배실은 돌로 이루어진 원형건물이었는데, 서까래가 곁으로 드러난 천장과 그 중앙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빛줄기가 일품이었다. 게다가 예배당 바닥에 깔린 멍석과 비틀어진 나무 십자가는 소박미의 절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산정동 대성전보다 느낌이 좋았던 곳은 광주대교구 역사박물관이었다. 1937년도에 건립된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광주대교구 최초의 교구청 자리였다고 한다. 세월이 묻어있는 박물관 지하공간은 성스러웠다. 그 옛날 카타콤배를 재현해 놓은 겟세마네 동굴과 작은 기도실은 디아코니아 자매회 예배실 분위기와 닮아있었다.

특히 겟세마네 동굴에 있던 십자나무는 인상적이었다. 바위에 드리운 십자가 그림자 형상이 마치 성모마리아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건너편에는 토굴 기도실이 있었다. 기도실에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글씨가 새겨있었다. 나는 잠시 일행과 떨어져 그곳에 들어가 보았다.


뒤늦게 일행을 찾아가 보니, 다들 박물관 도슨트의 설명에 심취하고 있었다. 옆에서 들어보니 웬만한 설교보다 감명 깊었다. 안내가 끝나자 회원들은 도슨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신부님이죠?”라며 느닷없이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일행들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나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좁은 지하공간에 웃음이 퍼졌고 나는 무안해졌다. 박물관을 나서는데 도슨트가 내게 오더니 “신부님 같았어요”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성전으로 이어진 언덕길을 오르면서 신학교에 마음을 품었던 젊은 날이 떠올랐다.

대성전에 들어가 보았더니, 제단 앞에는 회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유해 일부가 모셔진 자리였다. 프랑스 리지외 출신인 성녀는 가르멜 소속 수녀였고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돌아가셨다. 흔히 소화(小花) 데레사로 불린다. 성녀가 남긴 자서전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신앙 서적이다.


가톨릭은 성인들의 유해를 보존하는 전통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골도 여러 조각으로 나눠 여러 성당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유해 흠숭 전통이 탐탁지 않다. 영혼이 사라진 육신은 허망한 것이 아니던가.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작가도 어느 글에선가 유골 흠숭을 허망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때는 나도 성녀 앞에서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성녀의 정결한 신심을 떠올리면 말이다.

미사를 바친 후, 해상 케이블을 바라보면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신안 퍼플섬에서 거센 해풍을 안고 보랏빛 다리를 걸었다. 다들 바람에 밀려서 휘청대고 있었다. 흔히 세상살이를 세파(世波)라 한다. 세상의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중심을 꽉 잡아야 한다. 나는 날려가려는 모자를 꽉 하니 움켜잡았다

해거름 무렵, 신안군에서 선물로 준 소금 세트를 들고 귀가했다. 아내는 소금 세트를 받고선, "아침에는 소금 엎었더니, 저녁에는 소금 가져왔네"라며 용서해 준단다. 마치 그분께서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소금’을 주신 것 같다. 이래저래 참으로 자상한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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