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부터 15일까지 풍경소리 독자 모임 있습니다.” 『풍경소리』 지난 호에 실린 독자 모임 안내 글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일정을 확인해 보니, 이를 어쩌라. 개학 날 14일이다. 아무래도 참석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문득 헤아려보니 독자 모임 마지막 참석이 벌써 칠팔 년 전 일이었다.
풍경소리 독자 모임 첫 참가는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그 무렵 『풍경소리』 독자가 되었고, 그해 여름 하동군 악양면에서 열린 독자 모임을 찾아갔다. 정오 무렵에 도착한 악양은 푹푹 찌는 무더운 날이었고 매미 울음만이 푸르름 속에 가득했다. 마침 짐을 옮기고 있던 일부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먼저 와 있던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눈인사했다. 서울, 부산, 창원, 목포 등 전국에서 모인 독자들 이건만 분위기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늦은 오후 그림자가 길어질 때쯤, 단소를 손에 든 초로의 얼굴 맑은 분이 일부님과 들어왔다. 참가자들은 ‘이현주 목사님 오셨네’라며 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관옥 이현주 목사님에 대해서는 『노자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뵌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잠시 후, 일부님은 ‘NO 프로그램 진행과 하루 한 끼 식사’ 임을 참석자들에게 안내하셨다.
하지만 하루 한 끼라는 일부님 안내와는 달리 이때의 독자 모임은 육, 해, 공의 음식들로 풍요로웠다. 참가한 독자들이 정성껏 조금씩 가져온 먹거리가 모임방에 쌓이고 있었다. 둘째 날 저녁으로 기억된다. 당시 흙 피리 신동으로 알려진 지리산 소년 나태주의 즉석 공연이 열렸다, 연주가 끝나자, 불판에 올려졌던 오징어와 돼지고기에서 피어난 냄새와 연기가 어두운 허공에 맛있게 퍼지고 있었다.
낯설지만 편안한 진행과 여러 독자의 진솔한 나눔. 관옥 선생님의 말씀과 참가 독자들의 고요함까지. 마치 딴 세상을 다녀온 듯한 체험이었다. 게다가 모임 후 신통한 일이 있었으니, 명상 때마다 괴로웠던 혼침(昏沈)이 사라진 것과 그해 늦가을, 노자 읽기 모임에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공주 영천사, 악양 자연농업기술센터, 강진 남녘교회, 나주 태평사, 고창 미소사, 순천 사랑어린배움터 등, 해마다 8월이면 풍경소리 독자 모임을 참가했다. 그렇게 십여 년 넘게 설레는 마음으로 독자 모임에 달려가곤 했다. 이 가운데서 지금껏 잊히지 않는 수채화 같은 몇 장면이 있었다.
강진 남녘교회에서 독자 모임이 있을 때다. 관옥 선생님께서 ‘오늘은 각자 한나절 동안 자유롭게 지내면서 각자가 경험한 한님을 저녁 시간에 나눠보자’고 제안하셨다. 일종의 자유시간이 주어진 것이니 반가웠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영암 무위사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한량처럼 시간을 보낸 다음, 강진읍에 있는 영랑생가를 찾아갔으니 관광객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아이스콘을 먹으면서 말이다. 내 마음속에 한님은 피서 가고 없었다.
저녁 나눔 시간이 되었다. 다들 예배당에 빙 둘러앉아서, 한나절 동안 헤아려본 한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날 연로하신 김복관 선생님의 말씀에 좌중이 숙연해졌다. 무더운 낮 동안 김복관 할아버지는 농민들을 생각하면서 선풍기도 틀지 않은 채 좁은 방에서 땀을 흘리며 계셨다는 것이다. 종일 주변 볼거리를 찾아다니면서 시원한 음료를 입에 달고 다녔던 나는 속이 뜨끔 뜨끔, 따끔따끔했다.
고창 미소사는 작지만 예쁜 절이다. 그곳 별채 이층에서 독자 모임이 있었다. 첫날밤 몇 분들과 읍내까지 진출해서 늦은 밤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밤공기를 가르던 청아한 풀벌레 소리와 반짝이던 별빛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음 날에는 점심 공양 후, 손부채로 따가운 햇볕을 가리면서 고창 읍성까지 걸었던 장면도 한 장의 영화 속 스틸컷처럼 선명하다. 찬물에 몸을 부르르 떨었던 미소사의 등목까지도.
공주 영천사는 공산성 안에 있다. 그때의 독자 모임에는 비가 자주 내렸다. 법당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금강이 너울대고 있었다. 내린 비로 불어난 금강의 물줄기는 도도했다. 독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는 희미한데, 함께 불렀던 ‘아기곰 한 마리’ 동요만이 떠오른다. 모임 마지막 날에는 송호일 목사님 가족이 왔다. 당시 『풍경소리』에서 톡톡 빛나던 동시의 주인공 송하원 양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난감했던 순간이 있었다. 장소는 뚜렷하게 알 수 없지만, 이른 아침 시간부터 참가자들이 관옥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다. 한데 내 눈 위로 달콤한 졸음이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눈은 떠 있지만 반수면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졸음의 경계를 즐기고 있었는데, 뭔가 주위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정신을 차려보니 관옥 선생님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깼으나 이를 어쩌랴. 질문을 모르니 답할 도리가 있겠는가. 관옥 선생님은 안타깝다는 듯 화제를 돌렸고, 나는 종일 민망했다.
풍경소리 모임 때마다 함께 달려갔던 벗들이 생각난다. 열매, 마리아, 피리, 목강, 유천. 작은 나무 등 다들 잘 계신지요? 인도의 베다 경전 우파니샤드는 ‘스승의 곁에서 말씀을 듣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한여름의 풍경소리 독자 모임은 내게 우파니샤드였다.
올해 독자 모임도 와온 바다의 노을과 어둠에 빼곡한 별빛, 갯벌의 곡선이 함께 했을 것이다. 더불어 관옥 선생님의 맑은 음성과 일부님의 너른 자락이 풍경소리 독자들에게 울림이 되었으리라. 바라건대 마음 착한 풍경소리 독자들과 와온 공원에 누워서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 바다에 퐁당 빠지고 싶다. 한여름 밤의 꿈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