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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Jun 15. 2023

커피배틀

 부장님. 이제 캡슐커피로 바꿔보세요.” 뜨거운 물에다 믹스커피를 붓고 있는 내게 젊은 후배가 말을 걸어왔다. '어라~ 이건 뭐지?' 마치 당신은 구세대입니다라는 뜻으로 들리니 말이다.

     

 얼마 전 사무실에 산뜻한 캡슐커피머신이 놓인 후부터 캡슐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늘었다. 하루는 캡슐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슬쩍 엿보았는데, 패인 자리에 캡슐을 넣은 후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내려지는 간단한 공정이었다. 하지만 ~ 요즘 젊은 친구들은 저렇게 마시는군이라는 생각했을 뿐 동참할 마음은 없었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을 믿는 나로서는 오랜 벗, 믹스커피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삶의 나이테가 더 해지면서 낯선 기계장치나 프로그램과는 서먹해졌다. 손에 익은 것이 편했고 새로운 것과 마주치면 긴장이 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커피만 해도 간단한 인스턴트식 커피가 마시기 편했다. 그 달달한 맛은 에너지 소모가 빠른 우리 세대한테는 뽀빠이의 시금치와 맞먹는다. 해그림자 길어지는 오후에 마시는 믹스커피는 퇴근 시간까지 책임지는 보조 배터리였다. 비만의 원흉으로 믹스커피를 의심하고 있는 아내도 고개를 끄덕이는 부분이다.    

 

 믹스 커피는 생각의 예열이 필요할 때나, 오후의 나른함이 몰려올 때면 저절로 찾게 된다. 막대 형태의 윗부분을 자른 후, 컵에 쏟으면 하얀 프림과 설탕이 갈색의 커피 알맹이와 하나가 되어 컵 안에 쏟아진다. 이어서 뜨거운 물을 붓고 티스푼으로 두세 번 돌려주면 노곤함을 쫓아 줄 커피가 탄생한다. 이른바 찐한 에스프레소와 말끔한 아메리카노에 필적할 달짝지근 대한민국 k-커피다.     


 점차 뱃살이 허리띠 밖으로 쫓기고 있었다. 자칫 청바지도 못 입을 못된 체형이 될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비만의 주범으로 믹스커피를 지목했고 결별을 요구했다. 하긴, 믹스커피는 설탕물에 가까운 커피 맛이다. 달달 커피와 이별도 시도해 보았지만, 며칠 못 가서 그 달콤한 맛에 항복하곤 했다. 이른바 설탕 중독, 그 꼴이었다.   

  

 언젠가 방송에서, 사회자가 어느 해외 유명 커피 소믈리에한테 믹스커피 한 잔을 건네면서 맛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커피 맛을 음미하던 그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엄지 척을 했다. 그러면서 귀국할 때 K-커피 한 상자를 사야겠다고 했다. 또 아메리카노 커피는 가짜라며 짜증을 내던 이탈리아 관광객마저 믹스커피를 마셔본 후, ‘원더풀을 연발했다. 

    

 어찌 보면 믹스커피는 이단이다. 비만, 콜레스테롤, 당뇨의 주범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커피 취향을 세대 갈등으로까지 번지게 한 주범이다. 가령 커피의 기호에 따라서 믹스커피를 고집하는 올드한 인간형과  캡슐커피를 선호하는 젊은 인간형으로 나누어진다. 올드파의 입장에서 볼 때,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일명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젊은이 볼 때면 그 독특한 커피 취향에 혀를 차곤한다.   


 작년, 봉화에 있는 광산에서 매몰되었던 광부 두 명이 무려 221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땅에 갇혀있는 동안 마침 근처에 있던 믹스커피를 식량 삼아 아흐레를 버텼다고 했다. 지하 갱도에 갇혀있는 동안 커피를 떨어진 물에 녹여서 끼니 삼아 마셨다고 하니, 천덕꾸러기 믹스커피가 생명을 살린 셈이었다.      


 광부들이 극적으로 구출된 다음 날이었다. 그날따라 어떤 자긍심으로 캡슐커피머신 옆에 놓여있던 믹스 커피를 집었다. 마침 며칠 전 내게 건강을 챙기라며 캡슐커피를 권했던 후배가 다가왔다. 그를 향해서 오늘 믹스커피 어떤가? 라며 목에 힘주어 말했다. 후배도 말뜻을 이해했는지 생명을 구한 달달한 k-커피가 새삼 달리 보였다며 미소로 답했다.    

 

그날 점심시간. 그 후배에게 달달 커피를 타 주었다. 후배는 웃으면서 답례라며 내게 캡슐커피 한 잔을 내려주었다. '어라~ 커피 배틀인가?' 그렇게 달달한 K-커피 향과 고소한 커피 향이 사무실로 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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