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인 집에 알게 된 시다. 제목은 <참 우습다>이다. 속뜻을 헤아릴 필요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다. 시적 화자는 마음은 청춘인데 어느새 나이가 꽤나 들었음을 깨닫고 놀라워한다. 나이 듦을 노래하건만 회한이나 푸념이 아닌 경쾌한 분위기다.
작가는 최승자 시인이다. 최승자라 하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왔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을,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서도 온다”라는 <개 같은 가을이>의 작가가 아니던가.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내 알음알이는 딱 여기까지다. 시인의 대표 시집이라 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사랑』은 내 문학 소양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것은 독특하고 날 것 자체의 미학이었다.
난수표 같은 최승자 시인의 작품과는 달리, <참 우습다>는 밝고 발랄하다. 그경쾌함은 ‘맹키로’라는 전라도 사투리와 “포르르포르르, 흐르르흐르르”와 같은 의태어의 덕이 크다. 한데 그 밝음 속에도 시인의 고난은 여전해 보인다. 그녀는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는데”라며 투병 중임을 고백한다. 148cm의 신장에 몸무게 38kg, 깡마른 얼굴. 사진 속 최승자 시인의 외모는 처참했고 담배를 물고 있는 표정은 슬퍼 보였다.
오래전 중앙일보기사에서는 최승자 시인이 정신분열증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3평짜리 고시원과 여관을 전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기사는 신비주의에 빠진 탓에 정신병원을 드나든다고 첨언했다. 시인은 인터뷰에서 노장사상, 명리학, 점성술 등 심취해 생긴 병이라 했다. 문학적 감성 너머의 그 무언가를 추구하다가 정서적으로 사단(事端)이 났던 모양이다. 스승 없는 신비주의 공부는 위험한데 말이다.
자신의 나이를 망각할 만큼 고단했던 최승자 시인은 지난 세월을 가리켜 “참 우습다고” 말한다. 56세의 나이를 거리에 버려진 신문에서 알았다고 하니 그 딱함이 알만하다. 십여 년 시간이 지난 지금, 시인의 삶을 어떨까? 그 허무와 좌절을 이겨냈을까. 전하는 말에 따르면 시인은 포항의 한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종교에 귀의한 그녀가 행복하길 바란다.
나는 65년 을사년 생이다. 내년이면 이순이다. 가까이 노년의 소리가 들려오면 ‘깜짝’ 까지는 아니지만 놀라곤 한다. 옛날 어른들에게 들었던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탄식이 생각난다. 바라건대 ‘마음만이 청춘’이 아닌 ‘마음도 청춘'이고싶다. 생의 나이테는 해마다 겹겹이건만 세상살이에는 여전히 우왕좌왕이다. 나이 먹는 것과 철이 드는 것은 별개인가 보다.
‘어떤 노년을 맞이해야 할까?’는 요 근래 나의 화두다. 육체적, 경제적, 인간관계 등 산적한 생의 숙제가 무겁기만 하다. 가끔 ‘늙어서 참 편하고 좋다’는 말하는 선배들을 볼 때면 그 여유로움이 부럽다.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자연스레 ‘생긴 대로 살아간다’는 말처럼 편안한 꼴값을 소망한다.
혹시 ‘아시다 아유미(石田良子)’를 아시는가. 낯선 이름이라면<블루나이트 요코하마>라는 일본 노래를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노래의 주인공이 아시다 아유미다. 중학생 시절, 이 노래를 들으면서 ‘요코하마’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도쿄보다 오사카보다 요코하마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엊그제 SNS에 칠순이 훨씬 지난, 아시다 아유미가 기모노를 입고서 <블루나이트 요코하마>를 노래하는 장면을 보았다. 80년대 초반, 고았던 가수는 이제 칠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가 되어 열창하고 있었다. 화장을 안 한 얼굴이지만 세월의 주름은 선명했다. 노래를 듣다 보니아시다 아유미 할머니에게는 기품이 풍겨났다. 수행력 높은 종교인의 맑은 얼굴과도 닮았다. 최승자 시인과 이시다 아유미는 네 살 차이의 비슷한 연배였다
모쪼록 최승자 시인의 여생이 포근했으면 좋겠다. 나 또한 시에 나오는 소년처럼 ‘포르르포르르’하면서, ‘흐르르흐르르’ 시어처럼 자연스러운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시인과 관련된 한 가지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는데, 내가 아끼는 책인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의 번역자가 최승자 시인이었다.
생각해 보면 침묵과 품격있는 노년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 많은 노년은 얼마나 가볍고 재앙이던가. 그저 “포르르흐르르”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갈 일이다. 어찌 보면 삶이란 웃기는 한 편의 희극일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