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늘어진 장마전선 같거나 터널에 갇힌 듯 막막한 기분. 명리학에서 말하는 액(厄)과 살(殺)이 껴든 날. 빌빌 꼬인 일상은 난파선처럼 정처 없이 대양을 맴돌고. 심란한 계절이다. 이런 날에는 술을 찾는다지만 무알콜 청정 체질인 나는 술을 마시면, 되려 기분이 엉망이 된다. 그저 만사가 귀찮을 뿐이다. 이럴 때는 동면에 빠진 곰처럼 나의 동굴로 직행하는 것이 상책이다.
서재는 나의 동굴이다.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벽에 걸린 사진을 응시한다. 대나무 피리를 연주하는 손을 확대한 사진이다. 오래전 나주 태평사에서 인연 따라 내게로 온 것이다. 딱히 제목은 없지만 ‘피리를 연주하는 손가락’ 쯤으로 하면 되겠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다가 마음에 빨간불이 켜질 때면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다.
피리를 연주하는 손가락의 주인공은 목사님이다. 그분은 대나무 피리를 들고 다니면서 곧잘 연주하신다. 아마도 누군가 목사님이 피리 연주할 때 찍은 모양이다. 사진에는 연주자의 얼굴 대신 피리의 지공을 누르는 손가락만이 크게 나와 있다. 작품 사진이라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보통 사진으로 취급하기엔 아쉬운 사진이다.
그날 태평사에 있었던 풍경소리 모임 참가자들은 준비해 온 선물들을 내놓았다. 모임 끝 무렵에 그 물건들을 서로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선물들은 하나둘 새 주인들을 찾아갔다. 그때 내가 챙긴 것이 피리 연주 사진이었다. 실은 포대 화상을 닮은 목포에서 오신 목사님과 피리 사진을 두고서 신경전을 펼쳤다. 결국 가위바위보를 할 상황에 이르자, 목포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양보해 주셨다. 내가 고마움을 전하자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했다. 활짝 웃는 표정이 포대 화상과 닮아 보였다.
서재에 걸려있는 ‘피리를 연주하는 손가락’ 사진을 볼 때면 흐뭇했다. 간혹 사진 속 피리의 생김새를 관찰하곤 한다. 피리는 속이 비어야만 소리를 낸다. 텅 빈 공간 사이로 연주자의 숨결이 오가면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금속 악기도 목관 악기도 비어있는 공간이 있어야만 소리를 낼 수 있다.
피리처럼 마음도 비어있어야 한다. 노자도 위도일손(爲道日損)이라, 덜어내는 것이 도(道)라고 했다. 삶이 힘든 이유도 덜어내지 못한 탓일 것이다. 연주할 수 없는 피리는 악기로서의 생명이 없다. 버림을 받거나 그저 땔감으로 쓰일 것이다. 숨결이 막힌 피리를 어디다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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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이 타고 흐르는 피리 소리에는 절대자의 숨결이 들어있다. 숨결은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기도와 명상은 가까운 사촌쯤 된다. 목적지는 같으나, 가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이다. 나는 조석으로 기도를 드린다. 성무일도와 묵주기도 그밖에 묵상 등 여러 기도를 의무적으로 드리고 있다. 간혹 중요한 일을 앞둘 때면 49일이라는 특별한 기도를 바친다. 그러고 보니 피리와 기도의 속성은 닮아 보인다. 기도란 신의 기운이 통하는 영혼의 피리다.
피리를 부는 청춘의 신이 있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등장하는 크리슈나 신이다. 검푸른 얼굴을 가진 크리슈나 신. 이 청년의 신은 피리를 불면서 중생을 즐겁게 해 준다. 크리슈나가 연주하는 피리 선율은 상심한 인간을 위로해 주는 치유제다.
티베트 불교 전시회에 갔다가 사람의 두개골 된 피리를 보았다. 조장(鳥葬) 풍습만큼이나 오싹해 보였다. 인골을 피리로 부는 까닭이 무엇인지. 과연 소리가 나는 것인지 궁금했다. 인골 피리는 부정관(不淨觀) 수행을 위한 도구였다. 티베트 인골 피리는 삶의 애욕을 내려놓게 하는 신의 도구인 셈이다.
크리슈나의 피리, 티베트 인골 피리보다 멋진 피리가 있다. 옛 신라시대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가 있었다. 전쟁과 기근 때 만파식적을 불면 해결되었다고 하니, 여의주와 같은 악기이다. 만파식적은 삼국을 통일 대업을 이룬 문무왕이 죽은 후, 용이 되어 아들 신문왕에게 전했다는 대나무 피리다. 눈을 감으면서도 나라를 염려했던 대왕의 염원이 스며있다.
내가 바치는 기도가 피리를 닮으면 좋겠다. 신의 호흡에 따라 세상으로 퍼져가는 선율처럼. 텅 빈 피리를 화두 삼아 진리의 숨결에 따라 살아가고 싶다. 부디 신의 호흡이 잘 닿는 피리가 되어달라고 손을 모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