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때였다. 하루는 담임 선생님의 조회가 이상했다. 평소와 달리 깊어진 목소리로 어느 유명 할리우드 여배우(누구더라?)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담임은 잠시 그녀를 회상하더니 ‘참 인생이 짧다’라면서, 우리에게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맥락 없는 말로 조회를 마쳤다. 매일 반복된조회건만, 40년 전, 담임의축 쳐진 조회가 이제껏 기억에 남아있다니 신기하다.
얼마 전,그때의 담임 선생님마음이 헤아려지는 일이 있었다.출근 준비로 분주한 아침이었다.그때 뉴스 진행자가 팝 가수 올리비아 뉴톤 존이 향년 73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순간동작을 멈춘 채,TV 화면을 바라보았다. 뉴스 화면에는 추억 속의 그녀가 활짝 웃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 말 따라 인생무상이었다.'냄비 위에 밥이 타'로 들리던 ‘피지컬(physical)’을 부르던 그녀를 넋 잃고 바라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2
학창 시절, 어느 토요일 오후가 떠오른다. 그날하숙집점심은 수제비가 들어있는 특선 라면이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주로 밀린 빨래를 했다. 깨끗해진 옷가지를 양지바른 옥상 줄에 걸어두면 기분마저 뽀송뽀송해진다. 남은 시간에평상 마루에서신문을 읽는 것은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날도 신문을 보고 있다가, 금발의 아름다운 여자 사진에 눈이 멈추었다.분명 천상에서 강림한 여신이었다.미소 또한천사의 미소였다.
그녀에게는바비인형과 천사가 반반씩 섞인 아우라가 빛나고 있었다. 금발에 오뚝한 코와 동그랗고 깊은 푸른 눈동자, 백합처럼 활짝 피어난 미소. 고혹적인 미모라기보다는 기품 있는 순수함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이름도 예뻤다. ‘올리비아(oilvia)’라는 부드러운 발성과 ‘뉴톤 존(newton-john)’이란 지적인 이미지가 결합된 세련된 이름이었다.그 시절‘올리비아 뉴톤 존’은 세상 남성들의 제너두였다.
그날 그녀를 처음 보았던 신문 하단에는 영화 그리스(Grease) 개봉 소식과 함께 그녀와 존 트라볼타 얼굴이 실려 있었다. 영화 그리스(Grease)는 국가명이 아니라, 50년대 멋쟁이 미국의 젊은이들이 바르던 머릿기름이라고 한다. 이 영화는인기 뮤지컬을스크린으로 담은 청춘물이었다. 올리비아 뉴톤 존은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 샌디 역을 맡았는데, 상대 역인 존 트라볼타 보다 여섯 살이 많은 연상이었다.
영화 그리스(Grease)OST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이 앨범에는 주옥같은 곡들이 가득하다. 이 앨범에서 올리비아 뉴톤 존은 <Summer night>을 비롯한 여러 곡을 불렀다. 나는 이듬해지금은 사라진 아시아 극장에서 늦은 저녁 마지막 상영 시간에 그리스를 보았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만난 그녀는 생기발랄 동네 예쁜 누나 같았다. 영화는 끝났고극장 밖에 나와보니 이미 버스는 끊어졌다. 결국 하숙집까지 영화 속 노래를 흥얼대면 걸었다. 자정 다되어가던 그때 그 거리를 비추던달빛에서도 그녀가 노래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올리비아 뉴톤 존의 히트곡은 70년대와 80년대로 구분된다. <Let me be there>와 <Have you never been mellow>와 같은 컨츄리 풍의 맑은 노래가 1970년대였다면, <physical>과 <Magic>으로 대표되는 80년대 초반 그녀의 음악은 고혹적이었다.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그 중간 지점에그리스(Grease) OST가 있다. 이 앨범에서는그녀의 호소력 짙은 절창인 <Hopelessly devoted to you>도 수록되어 있다.
#3
개인적으로 올리비아 뉴톤 존의 인기곡 가운데 제나두 <Xanadu>를 으뜸으로 꼽는다. 이 곡은 인기 록밴드 E.L.O와 함께했다. 그녀의 여느 음악과 달리 쿵쿵~하는 신나는 비트로 시작되는 제나두 <Xanadu>는 그녀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당시 라디오 DJ들은 제나두가 이상향을 의미한다고 풀이해주었다. 이상향? 유토피아란 뜻인가? 호기심은 공부의 원동력이다. 제나두 <Xanadu>의 연원을 찾다 보면, 느닷없이 몽고의 쿠빌라이 칸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역사 지식이 필요하다. 영국의 시인 쿨리지 시 가운데는 <쿠블란 칸>이란 작품이 있다고 한다. 이 시의 한 구절은 이렇다. ‘쿠블란 칸(쿠빌라이 칸을 의미)은 제너두에 웅장한 환락궁을 지으라 명했다.’ 여기서 제너두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나왔다고 한다. 마르코폴로가 누구인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서 원나라에 간 제네바 상인이 아니던가? 그는 쿠빌라이 칸(세조)의 절대 신임 속에 고위직까지 지낸 특이한 경력의 가지고 있다. 훗날 그가 쓴 <동방견문록>은 유럽 대항해 시대를 열게 했다.
'제나두'란 발음 탄생의 사연은 흥미롭다. 내몽골에 위치한 '상도'는 원제국의 여름 수도였다. 이 상도가 몽골 발음으로 '상뚜'인데, 이 발음이 '새너두'를 거쳐서 '제너두'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나두'는 마르코폴로가 화려한 동방의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후로 제나두 <Xanadu>란 곧 이상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4
이번 여름, 가족들과 충주로 피서를 갔다. 장거리 드라이브 때는 CD를 챙기곤 하는데 이번에는 <올리비아 뉴톤 존 베스트>를 골랐다. 자가용 출발과 함께 올리비아 뉴톤존의 <Have you never been mellow>가 첫 곡으로 나온다. 아내가 “오랜만에 들어 보네”라며 좋아한다. 아내는 며칠 전 별세한 그녀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
올리비아 뉴톤 존은 유방암으로 30년 넘게 투병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암연구센터를 세웠다. 또 환경과 버려진 동물을 보호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영국 왕실은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호주 국적인 그녀에게 대영제국 2급 훈장을 내렸다. 이후로 세상은 그녀의 이름 앞에 “Dame”라는 경칭을 올렸다.
30년이란 길고 긴 암 투병 견뎠을, 아름다운 스텔라, 올리비아 뉴톤 존. 당신 덕분에 우리의 눈과 귀가 즐거웠습니다. 이제 이 지상을 떠난 당신이 제나두 <Xanadu>에도착해서건강한 얼굴로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당신이 남겨주신 노래에 감사합니다. (*호주 정부는 그녀를 애도하며 수도 멜버른를 밤새 핑크 조명으로 밝혔다고 한다.)
<Xanadu> - 올리비아 뉴톤 존
A place where nobody dared to go / 아무도 감히 갈 수 없는 곳
The love that we came to know / 우리가 알게 된 사랑
They call it Xanadu / 제너두라고 불러요
And now, open your eyes and see / 이제 눈을 뜨고 보세요
What we have made is real / 우리가 만든 것은 진짜입니다.
We are in Xanadu / 우리는 제나두에 있습니다.
A million lights are dancing / 백만 개의 빛이 춤을 춘다.
And there you are, a shooting star / 저기 있네, 별똥별
An everlasting world and you're here with me
영원한 세상, 그리고 당신은 나와 함께 있습니다.
Eternally / 영원한
Xanadu - Xanadu (now we are here)
In Xanadu / 제나두에서
Xanadu - Xanadu (now we are here)
In Xanadu / 제나두에서
Xanadu your neon lights will shine / 제너두 네온사인이 빛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