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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쓸모에 대하여

나는 쓸모있는 사회인인가

by 꼬르륵

디즈니 시리즈, ‘무빙’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다쳐도 죽지 않는 구룡포라는 인물이

어느 날 내근직으로 발령이 나서

독수리 타법으로 문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문서를 만드느라 씨름하던

구룡포가 어느 날 아내에게 말한다.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긴 아내가 구룡포의 입에 상추쌈을 마구 우겨 넣어주며 말한다.


“넌 나의 쓸모야”

“내가 너의 쓸모고”


무빙 시리즈를 정주행하며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거 원작자가 누구야?!'

인물마다 서사며, 시대적 배경이며, 부모와 자식의 애증이며 무엇하나 헛으로 다루지 않은 원작자의 내공에 나는 질투가 났다.

‘어떻게 이렇게 다 잘 살려낼 수 있지?‘


그리고 나는 요즘 나의 고민과 묘하게 접점이 있는 쓸모에 대한 장면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지금껏 나를 설명해주던 테두리가 사라지면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쓸모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딸, 며느리

나는 이 수식어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인가?

만족할 수 없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형태로 나의 쓸모를 증명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로 시간만 나면 나를 물감에 스며드는 스펀지처럼

우울의 늪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다 문득 이 문장을 만났다.


“저는 자신의 한계에도 장점에도 고통에도 행운에도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한계는 한탄하고 장점은 과장하는 그런 태도 말고요.

한계도 장점도 길을 내딛는 하나의 원료로 쓰는 거지요

어차피 한계와 결핍과 고통에서 모든 중요한 것들이 나 나옵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서글픈 일은 아닙니다.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없기만을 바란다면, 고통이 없는 척한다면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둔다면 우린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생활의 천재들 中 발췌, 정혜윤)


그러자 내가 한계를 만난 후 할 수 있게 된 것들이 생각났다.

운전, 수영, 원고, 방송 진행 등

나는 부단하게 창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어떤 접점을 만들어 앞으로 내 인생에 새로운 가능성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해결하지 못한 빚처럼 늘 마음속에 찜찜함으로 남았던 목표를 또 이뤄보기로 마음먹었다.

시작도 안 하고 결심만 했지만 일단 적어본다.

뭐 어때 여기는 좀 찌질해도 되는 글쓰기 공간이니까.


그러니 스스로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게 될 때 우울하지 말자. 또 다른 창조가 시작될 징조다.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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