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하게 익은 음악 일기를 쓰기 시작하며
# 결국, 노래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사과나무를 키우셨다. 그냥 키우신 게 아니라 산 전체에 사과나무를 빼곡히 심으셨다. 어떻게든 더 벌어보시려고 아버지가 객토(농경지의 지력을 높이기 위해 다른 곳에서 흙을 가져다 섞거나 덮는 것. 아버지는 산의 흙을 파셨다)를 해 그 산의 높이가 예전 같지 않지만, 그곳은 원두막도 한번 거치고 토끼가 사는 언덕도 지나야 꼭대기에 갈 수 있는 산이었다.
객토. 어릴 적 나는 '객토' 작업을 꽤 오랫동안 목격했다. 큰 트럭 몇 대와 포크레인이 아버지의 산을 파고 깎아 내리고, 마침내 벌겋게 드러난 속살을 퍼다 나르는 것을 몇 날 몇 일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로 들어서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산을 깎는 포크레인과 트럭 무리들이 창문으로 보였다.
그러자 흰 모시를 곱게 차려입고 마실을 다녀오시던 동네 할아버지가 쯧쯧하시며 뱉으시던 한마디.
"아이고, ***(우리 아버지)이가 즈(자기) 아버지 산 다 팔아먹는다"
엄밀히 말하면 상속과 형제간의 거래로 이미 산 전체의 소유주는 아버지로 바뀐 지 오래였지만, 왠지 모르게 동네 할아버지의 역사가 담긴 듯한 한탄은 내 머리에도 꽤 오래 남아있다. 그렇게 산을 판 건지, 땅을 판 건지 모를 아버지의 야심 찬 사업 이후 그 산에는 원두막도, 물을 퍼다 쓴 우물도, 명절마다 흔들던 밤나무도 사라졌다. 무엇보다 나는 토끼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나보다 더 오랫동안 그 산에서 놀고 자랐을 텐데 돈이란, 아니 욕심이란 그렇게 야속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아버지는 시골 어른들이 새벽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일해도 따박따박 쥘 수 없는 돈을 어떻게든 벌어보려고 발버둥을 친 것 같다. 어느 날은 외양간에 소를 데려와 내내 잘 먹이고, 소 장사와 실랑이 끝에 파시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야심 차게 새로운 품종의 배나무를 들여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심기도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의 사십 대는 어떻게든 더 벌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일만 하셨던 것 같진 않다. 아버지는 재미도 추구했다. 우리 집은 트랙터 두 대였고, 트럭과 소독기계와 경운기와 오토바이가 있었지만 언젠가 아버지는 트랙터가 하나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며 엄마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는 안다. 새로 산 번쩍번쩍한 농기계에서 양갈래로 뻗어나오는 물들로 나무에게 물을 줄 때 동네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아버지는 내심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날은 어르신들이 자기 밭 일을 아버지의 기계로 도와줄 수 없겠느냐며 옥수수며 감자며 며칠을 갖다 놓고 가셨다. 그러면 아버지는 하루가 걸릴 일을 반의 반나절에 마치고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항상 노동요를 틀곤 했다. 밭에 트럭을 끌고 가실 때면 가요 테이프를 꽂고 볼륨을 최대한 켠 뒤, 차 문을 활짝 열어둔 채 과수 일을 하셨는데 그때 듣던 노래 가사들이 어린 내가 듣기에는 참 요상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아하!" "간이 간이 간이 간이 큰 남자에요~" "낭만에 대하여~" "찰랑찰랑"
흘러가는 가요들을 배경으로 일을 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나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뭔가를 끄적이면서 묘한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일하는 아버지 얼굴이 전보다 힘들어보이지 않고, 어느 때는 내적 흥을 건드리는 박자에 나도 흥얼거렸던 그 순간들. 나는 왜 일을 할 때 노래를 듣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방송 쪽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그토록 아버지의 시름을 달래주던 가수들을 거의 매일매일 보았다. 노래도 참 많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스튜디오에서 추억에 젖는 것도 멈춘 휴직 기간.며칠 전 나는 카페 관리를 마치고 노동을 하고 있는 아버지들의 삶의 현장을 지나게 됐다. 첨단산업센터가 들어올 예정이라 이미 작년부터 공사장 간이 벽이 설치된 건물에서 용접을 하는 건지 기계소리가 한창이었다.
2분 거리에 우리 무인카페가 있는 지라 센터가 완공돼서 업체 사람들이 들어오면 우리 가게도 많이 왔으면 좋겠다는 사심으로 바라보는 곳이었다. 그날도 언제나 완공돼서 사람들이 다니려나 생각하며 지나는데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고함치는 듯 부르는 노래가 웃긴 듯 이어 들리는 아저씨들의 웃음소리. 자세히 보니 다른 한켠 공사장 철근에 스피커 하나가 매달려있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잠시 노래를 멈췄던 아까 그 목소리의 노래가 또 이어졌다.
"힘겨운 날에 너 마저 떠어나아면"
한껏 끌어올리는 감성에 나까지 피식했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그분의 노래를 웃는 다른 동료나,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분이나, 다른 때보다 노동의 시름이, 삶의 시름이 덜하리라는 것을.
언젠가 그 공사 현장의 남색 점퍼를 입은 아저씨들이 우리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흔들어 마시며 나누시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딜 가면 집값이 싸고, 어딜 사놓으면 좋다더라. 근데 총알이 없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든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조바심에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아저씨들.
'결국, 노래'
나는 가게를 찾았던 그 아저씨들이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듣고, 따라 부르고, 웃음을 터뜨리는 현장을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우리 아버지의 삶의 시름을 덜어주던 노래가 또 다른 아버지들의 시름을 덜어주는 그 광경을 천천히.
결국, 노래구나.
어쩔 수 없이 올라오는 그리움에 먹먹해지는 마음. 지금 음악 방송도 라디오 방송도 제작을 못하고 있지만, 나는 결국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노래를 항상 그리워하고 있구나. 나는 결국 노래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래서 결국 또 음악과 관련한 글을 쓰고 있다. 이거 쓰면 뭐 나오냐는 말도 들었지만, 어쩌랴. 내게는 결국 노래가 가치있는 걸.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누군가의 시름을 덜어주거나 그 순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한 노래들이 더 가치있어 보이는 걸.
처음에는 원고료를 줄 수 없어 직접 원고를 쓰느라 오래된 노래를 듣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재밌어서 그만 찾기가 아쉬웠던 오래된 노래들을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감히 내 감상도 곁들인다.
웃고 있는 누군가의 아버지들을 떠올리며 공사장 옆을 천천히 걸었던 나처럼, 이 글을 읽으며 누군가는 그때의 삶을 천천히 걸어보길. 이 노래들이 가진 시간의 감각과 서정, 자연에 대한 감수성, 시대의 풍경, 그리고 진정성을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