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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Jul 20. 2020

결혼종주여행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우며 결혼생활을 유지해 온 남편과 나는 다행히 결혼 1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선택한 여행은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를 얻게 된다는 지리산 종주였다. 2박 3일치 무거운 배낭을 메고 밤기차로 구례에 도착했다. 허름한 모텔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 일찍 성삼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성삼재부터 지리산 천왕봉까지 수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2박 3일 동안 우리 둘은 걷고,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생각했다. 

 우리가 보낸 10년의 시간은 지리산 능선을 걷는 것과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능선도 실제로 가보면 생각보다 멀지 않았고 결혼 10주년도 어느 새 눈앞에 와 있었다. 능선을 걷다보면 오르막은 힘들고 내리막은 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좀 더 걸으면 내리막에서는 다가 올 오르막을 걱정하고 있고 오르막에서는 곧 내리막이 있음을 희망으로 여기게 된다. 우리의 결혼생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반복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일희일비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능선을 두 사람이 함께 걷고 있지만 각자의 페이스로 걷는 것이 중요했다. 둘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면 조금 덜 힘든 사람이 상대방을 기다려주며 끌어주고 밀어줄 때 함께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각자의 페이스를 인정하며 상대방을 기다려줘야 했다. 앞 선 사람이 덜 힘들다고 뒤에 따라 오는 사람의 속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속도에 맞추려 들면 서운함과 싸움이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왔다. 등산에서도 결혼생활에서도. 

 우리의 수많은 부부 싸움은 등산할 때 만나는 이정표였다. 누군가에게는 목표지점까지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희망이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도 목표 지점이 너무 멀리 있음을 알려주는 절망이었다. 부부싸움 역시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긋난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서로의 욕구를 확인하고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 이정표를 잘 읽었기에 결혼 1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결혼 후 배우자에게 만족하는 것은 천왕봉 일출이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만큼 결혼 후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기란 쉽지 않다. 오죽하면 부러운 배우자를 둔 사람에게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하겠는가. 지리산 종주 끝에 천왕봉 일출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 여행은 소중하다. 노고단의 들꽃, 세석산장에서 내려다 본 구름, 장터목 산장에서 바라본 석양, 일출을 보기 위해 깜깜한 새벽 천왕봉에 오르며 만났던 은하수만으로도 나에게 지리산 여행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남편 조상이 덕을 쌓았는지 대학생 때 나 홀로 갔던 지리산 여행에서는 못 보았던 천왕봉 일출을 이번 여행에서는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천왕봉 일출은 장터목 산장의 일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점이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어쩜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서로의 기대에는 못 미치더라도 이미 둘 사이에서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경험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으니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    

 2박 3일 동안 산에서 남편과 먹고, 자고,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지리산 종주가 가능했던 것은 남편과 내가 아프지 않았고 함께 옆에서 걸어 줄 수 있는 서로의 존재 덕분이었다. 남편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어 내 배낭이 조금 가벼웠던 것처럼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도 각자의 힘에 맞는 배낭을 메고 서로가 짊어진  배낭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했기에 지리산 종주 여행도, 결혼 10주년도 가능했다. 지리산 여행을 통해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다른 우리와 많이 닮은 우리를 보았다. 곧 다가올 결혼 20주년 여행은 석양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나는 요가를, 남편은 사진 찍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서로의 곁에서 즐기는 <요가 하는 아내, 사진 찍는 남편> 화보집 프로젝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여보, 다음 결혼종주여행지는 발리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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