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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Jul 20. 2020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 집으로 돌아와 산후조리를 시작하는 날부터 시작된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4층짜리 빌라 건물 3층에 살았던 나는 집에 불이 나면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떻게 대피해야 할까라는 조금은 황당한 걱정을 했다. 연기가 자욱한 건물에서 계단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난 창문으로 커튼이나 이불을 밧줄처럼 늘어뜨려 한 손에는 이불을, 다른 한 손에는 아이를 겨드랑이에 끼워 타잔처럼 줄을 잡고 내려가야 할까? 아니면 장롱 속 이불을 모두 창문너머로 던져 그 위로 아이를 안고 뛰어 내려야 할까? 이런 생각들이 항상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편이 당직으로 집에 못 들어오는 밤이 되면 나의 걱정은 더 심해졌고 머릿속에는 더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얼마 뒤 연년생 둘째 아들을 출산한 후에는 한 명이 아닌 둘을 데리고 대피해야 한다는 상황이 날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걸음걸이를 걷는 큰 아이와 갓난아기인 둘째를 나 혼자 과연 어떤 방법으로 보호해야 할까? 두 아들을 양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뛰어 내려야 하나? 나는 왜 아이를 출산하고 난 후부터 이러한 걱정을 했던 것일까? 물론 단 한 번도 불은 나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걱정도 점점 희미해졌다. 세월이 좀 더 흐른 후 난 그것이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부모가 되었다는 부담감에서 비롯된 무의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100일 가까이 된 아이는 무엇이 불편했는지 한밤중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울며 보챘고 내가 그 아이의 엄마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였다. 무진장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짜증스러움이 더해졌고 남편의 다음 날 출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새벽 두 시에 혼자 옆방에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구석에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대어 아이와 함께 울었다. 그것 말고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으니까. 내가 차마 그 시간에 병원 응급실을 가지 않았던 이유는 응급실 간호사로 근무하며 나와 같은 이유로 새벽에 소아 응급실을 찾아왔던 부모들이 병원을 오는 동안 진정된 아기를 안고 막상 병원에 도착해서는 딱히 할 것 없어 접수취소를 하고 가는 상황들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뉴스에서 어린이집 교사의 아동학대 소식이 전해지자 온 세상이 들썩였다. 기사의 댓글에는 입에 담지 못할 악담들이 적혀 있고 동네 이웃 할머니부터 중년의 아줌마들까지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한탄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난 대놓고 욕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감정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아이들과 나만 집에 남겨졌을 때 아이들에게 가끔씩 튀어 나오는 나의 모습이 저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과 종이 한 장의 차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자식 하나를 보살피는 엄마인 나도 이런데 여러 명의 아이들을 함께 돌보는 저 사람은 순간적으로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저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초등학교 1학년 큰아들이 나에게 묻는다. 

“엄마, 한국 엄마들은 왜 남의 아이들한테 잘 해? 자기애한테 잘해야지.” 

“........”

 이 아이도 알고 있었구나. 집에서 엄마가 자신에게 말하는 톤과 이웃 아이를 대할 때의 톤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구나. 가식적인 내 모습을 아들이 지켜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는 병원 지하 복도를 걸으며 흐느끼는 목소리로 남편과 통화중 이었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과 병원 지하 상점들이 흐릿한 배경이 되었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한 채 후회 가득한 목소리로 조금 전 진료실에서 들었던 말들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어머니, 꼭 일 해야겠어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같이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언어발달이라는 것이 만 60개월에 거의 완성되기 때문에 지금의 이 시기를 잘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을 남편에게 전달하는 동안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 중에 난 뭐가 슬펐을까? 만 60개월이 몇 달 남지 않은 둘째아들을 향한 미안함이었을까? 둘째 아들 출산으로 사직했던 직장을 둘째 아이가 돌이 갓 지난 시기에 경력직으로 재입사하였는데 또 여기서 그만 두어야만 한다는 아쉬움이었을까? 그 당시에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그 꺼이꺼이 울음이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3교대 근무로는 도저히 언어치료를 병행 할 수 없었고 첫째 아이 초등학교 입학과도 맞물려 베이비시터의 도움만으로는 육아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 날 이후 빠른 사직 결정을 하였고 아이의 언어치료도 시작하였다. 나의 가정에 대한 경제적 기여도가 아이들의 태권도, 미술 등 사교육비, 베이비시터 비용을 제외하면 실제로 100만원 남짓 정도였기에 두 아이를 육아하며 한 달에 100만원 정도 벌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교 강의 후 쉬는 시간에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왠지 그냥 넘길 수 없어 휴대폰에 남겨진 전화번호로 걸었더니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둘째가 3학년이 된 후 학교생활을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년을 몇 년 앞둔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순회하던 중 수업이 끝났는데도 교실 뒤 책상에 엎드려 담임 선생님과 대치하며 하교를 하지 않는 우리 아들을 발견하고는 직접 달래어 교장실로 데리고 와서 간식도 주고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나의 연락처까지 알아내어 전화를 한 것이라며 친절히 설명하였다. 이미 기혼의 두 아들을 둔 엄마인 교장선생님은 당신의 지나간 워킹맘 시절의 이야기를 하였고 아이들의 중요한 시절을 함께 하지 못해 뒤늦게 아들의 맘고생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책상에 엎드려 있는 나의 둘째 아들을 보고 행여 내가 바쁜 워킹맘이라 인생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본인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나와의 면담에서 이야기하였다. 교장 선생님의 진심이 담긴 면담을 마치며 내가 직장을 그만 두었지만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이들을 위한다고 병원은 사직 하였지만  당시 이미 대학 3곳에 시간 강의를 나가고 있었고 잘하고 싶었기에 강의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확보하고 싶어 했었다. 교장 선생님과 면담에서 나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는 엄마처럼 행동하였고 교장 선생님은 엄마와 면담을 하고나니 본인이 앞서 걱정한 것 같다고 말하였지만 그날의 전화 한 통이 나를 돌아볼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원초적 욕구에 대한 돌봄이 필요한 영아기, 유아기를 지나 또래와의 사회생활에 적응하며 적어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것들을 습득해 나가는 초등학교 시절이 끝나고 나면 이제 손 많이 가는 육아 대신 맘고생 육아가 시작된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이제 엄마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지를 깨닫게 되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과 현실 행동의 차이를 알게 된다. 이 사실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아주 손쉽게 자신들도 말과 행동의 차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현실에 흡수되기도 한다. 여전히 엄마는 아이들이 품속의 아이인 줄 알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하는 말의 영향에서 점점 멀어진다. 사춘기 두 아들은 나와 자신들이 타인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알려준다. 


 이렇게 여자로 태어나 엄마로 사는 것에 적응을 할 때쯤 여자가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마흔에 늦둥이 딸을 출산하고 난 후부터였다. 나의 부모님은 딸자식을 낳아 열심히 교육시켰고 능력 있는 남편 만나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으니 그것으로 본인들의 인생 숙제를 다 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받았던 교육과 직장생활에 대한 열정 등이 과연 필요했었나 싶을 정도로 쓸모없게 되어버린 현실의 내 모습을 겨우 추스려 다시 한 번 재취업을 꿈꾸며 아이들에게 엄마의 돌봄이 덜 필요한 시기만을 기다렸었다. 그런데 또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뽀로로 노래를 하루에도 수십 번 들어야 하며 커다란 기저귀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지만 사실은 그 보다도 ‘과연 내 딸은 어떻게 키워야 한단 말인가?’ 라는 고민이 더 컸다. 남편은 내놓고 말한다. “OO야, 넌 엄마처럼 살지 말고 너하고 싶은 것 다해라” 난 내 딸에게 과연 결혼에 대해, 엄마라는 역할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두려웠다. 아들을 키울 때와는 또 다른 고민이었다. 내가 만약 연봉 1억원이 넘는 직업을 가진 워킹맘이였다면 과연 직장을 그만두었을까?  직업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냐 안되냐의 변곡점이 되는 연봉의 마지노선은 얼마일까? 우리 딸이 어떤 경우에도 본인의 일을 그만두지 않도록 사회적 압박을 느끼지 않는 연봉의 직업을 가져야만 중고등학교 때 퍼부었던 노력과 대학 공부를 한 것에 대해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일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이 여성이 전업주부보다는 직장에 나가서 일하고 싶다는 의미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전업주부가 되던 직장에 나가던 엄마가 되는 순간 그 나름의 압박감이 전방위로 몰려오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담당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덜 한 경우라면 과연 워킹맘으로 남아 있는 여성은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압박 또한 덜해질까? 분명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아이와의 애착에 필요한 절대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환경이라면 억대 연봉자일 지라도 그 엄마는 자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난 워킹맘일 때는 자책감, 전업주부로 있을 때는 자괴감이라는 감정에 휩쓸려 나를 괴롭혔기에 이제는 진정으로 그 감정에서 자유롭고 싶다.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가족들과 갈등하며 얻는 상처는 가끔씩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가게 되기도 한다. 현실적인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은 지금의 세태에 맞추어 각각의 가정환경에 따라 변형되어 각자도생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봐주는 시어머니보다 친정어머니가 우리 주위에 훨씬 많은 이유도 단연코 손주가 이뻐서가 아니라 내 딸이 안쓰러워서 육아를 맡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내 딸은 어떤 세상에서 엄마가 될까? 아니면 엄마가 되기를 거부할까? 내 딸과 친정엄마인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 지 30년 후의 세상이 궁금해진다. 


 10년 동안은 미친 듯이 바쁜 워킹맘으로, 2년은 온전히 전업주부로, 4년 정도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만 일하는 엄마로서 살아온 나. 아이도 세 번이나 출산했고 젊어서도 출산을 경험했고 고위험산모로 분류되는 마흔에도 출산을 경험했던 나. 젊은 엄마로서 육아를 해보기도 하였고 두 번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은 후 체력의 한계를 느끼지만 그래도 경험 든든한 나이 든 엄마로서 육아도 하고 있는 난 과연 엄마로 산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이를 화재와 같은 물리적 고난 속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감? 나의 생리적 수면 욕구까지 참아가며 아이를 방치하지 않아야 하는 인간의 도리? 한 때지만 아이와 엄마의 관계가 약자와 절대자의 관계임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가끔씩 내 감정 조절이 안 되어 괴물이 되곤하는 나의 본성을 깨달아가며 후회와 반성을 반복하는 수행? 내 아이의 허물이 나의 허물이고 내 아이의 잘못이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까봐 전전긍긍하며 좋은 엄마가 되려고 남들 앞에서 이분의 일 정도 오버하는 가식? 아이가 보여주는 신체적, 정신적 발달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부모 책임이 가장 크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지하여 내가 열정으로 지새웠던 많은 시간들을 과감히 포기 할 줄 알아야 하는 희생? 내가 그렇게 나쁜 부모는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해야만하고 증명해야만 하는 과정? 그리고 드디어 중학생이 된 아들들을 통해 앞에서 말한 것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부모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며 그것은 엄마의 인생이고 자기의 인생을 지나온 엄마의 시간에 묶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아이와 내가 서로 남남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는 과정? 아니면 엄마는 내 엄마가 그랬듯이 자식을 위해 노년까지 바쳐야 하고 나의 결정보다는 주위의 분위기에 따라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것?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엄마의 수많은 역할과 심리적 부담감의 우선순위와 비율을 아이의 성장과 함께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야 하는 자리? 


  이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모여 난 지금의 엄마로 살고 있다. 지금의 엄마로 살아내기 위해  모든 과정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부모로부터 성장하며 얻은 경험, 남편의 생각, 아니면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결정을 해야 했다. 그렇게 내린 결정에 대해 나 이외에는 그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현실,  매 순간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결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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