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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Jun 01. 2021

마지막 수업

새벽 4시 30분, 눈을 떴다. 다시 잠을 청해 보지만 정신과 눈은 더 말똥말똥하다. 마지막 수업 날이라 생각이 많은가 보다. 맑은 눈으로 두 시간 정도 지나니 남편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평소처럼 카푸치노 한 잔을 만들어 남편에게 건넸다. 등교 수업하는 큰 아들을 깨우고 막내딸을 일찍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12년 동안 오가며 익숙해진 하남 나들목을 지나 순환고속도로를 달렸다. 익숙한 길이지만 자동차 안 공기는 조금 다르다. 이상은 <삶은 여행>을 무한 반복 들으며 학교로 향했다.  



A, B반 수업이 오전 오후로 나뉘어 두 번 있다. 오전 수업 시작 전 학생들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음...... 수업 전에 부탁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맑은 얼굴 또는 잠 덜 깬 얼굴로 날 쳐다본다. 

“오늘 수업이 여러분에게는 많고 많은 수업 중 하루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좀 특별합니다. 12년 강사생활의 마지막 수업이거든요. 여러분은 이 수업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평생 이 수업을 기억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은 다른 어떤 날보다 더 집중해서 들어주세요. 그럴 수 있죠?”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들렸다. 아쉬움, 놀라움일 것이다. 2학기 수업도 당연히 내가 강의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제가 마지막 수업이라고 하니 좀 애틋한 마음이 들었나요? 수업을 좀 더 잘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간호도 비슷해요. 나중에 간호사가 되면 병원생활이 여러분에게는 일상이 될 것입니다. 매일 아프다고 말하는 환자, 매일 보내는 검사, 매일 주는 약물, 매일 입원하는 환자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살면서 한 번 있는 삶의 위기일 수 있어요. 간호사인 우리에게는 일상이지만 환자에게는 일상이 아닌 특별한 순간이죠. 그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을 알아주는 간호사는 특별한 간호사가 될 거예요. 그럼 오늘 수업은..........”

평소와 다름없이 병원 경험을 섞어 오늘 수업 진도를 나갔다. 어느 때보다 두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듣는 학생들 마음이 보여서 고마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말고사만 남은 한 학기 수업을 정리하며 오전 수업을 끝냈다. 오후 수업 전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동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나만 있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오후 수업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카톡, 카톡, 카톡.......... 

오전 수업 단톡 방에서 카톡 알람이 연달아 울린다. 학생들 메시지가 올라온다. 한 학기 수업에 대한 감사함과 아쉬움,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응원까지 정성을 가득 담아 꾹꾹 눌러 보낸 것이 느껴졌다. 마치 미션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고마웠다. 학생들이 나를 배려하는구나. 나에게 특별한 날을 만들어주려고 애를 쓰는구나 싶었다. 단톡 방에서 마음을 전하기 쑥스러운 친구들은 개인 톡으로 왔다. 학생들의 메시지를 읽으며 결국 차 안에서 울고 말았다. 학생들의 마음과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가 뒤섞여 내 감정을 흔들어 놓았다. 



오후 수업까지 십오 분 정도 남았다. 마음을 추슬러 오후 수업을 해야 한다. 차에서 나와 강의실로 향했다. 뚜벅뚜벅 걸으며 학교를 쭉 둘러보았다. 조용한 운동장, 눈앞에 보이는 푸른 산, 익숙한 건물들, 초록 잎 무성한 벚나무들. 빙긋이 웃었다. 씩씩하게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 슬라이드를 띄우고 막 수업을 진행하려는데 오전 수업을 듣는 학생 몇 명이 강의실 문 앞에서 날 부른다. 커다란 꽃다발을 건넸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날 챙겨주고 싶었구나, 너희들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구나.’ 

실습실 401호를 배경으로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학생들 마음이 내 안에 콕 박혔다. 고맙다는 말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꽃다발을 들고 오후 수업을 위해 강의실로 다시 들어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학생들이 날 쳐다본다. 꽃다발을 들고 있으니 생일 같지 않냐며 싱거운 농담으로 올라오는 울컥함을 가라앉혀본다. 

이제 정말 오후 수업을 시작해야 한다. 

“음....... 수업 전에 먼저 한 가지 이야기할게요.” 눈물이 흘러 말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아....... 안 돼. 마지막 수업을 정말 잘 해내고 싶단 말이야.’

오전 수업 시작 전 학생들에게 했던 부탁을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학생들 표정이 잠시 흔들린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수업 내내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아쉬움, 애틋함도 있고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는 학생들이 사랑스러웠다. 



드디어 오후 수업이 끝났다. 이제 강의실을 나가야 하는데 아쉽다.  

“교수님, 사진 한 번 같이 찍어요.”

학생들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학생은 그 자리에서 인화해 <2021.5.31. 마지막 기본간호학 실습>이라고 예쁘게 적어 나에게 주었다. 사진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오늘 여러 번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학생들이 고맙다. 오늘은 수많은 수업 중 하나가 아닌 학생들과 나에게 특별한 수업이 되었다. 이제 정말 끝났는데 평소와 다르게 훌훌 털고 강의실을 빠져나오기 힘들다. 

“교수님, 30분만 더 있다 가시면 안 돼요?”

나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흔쾌히 자율 실습 30분을 더 봐주겠다고 했다. 한 학생이 나를 위해 수업 중에 어플로 케이크를 주문했다고 한다. 배달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학생은 내가 수업 후 집에 가 버릴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 모습도 예뻤다. 기꺼이 케이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것으로 우리의 마지막 수업 세리머니는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 오후 수업 단톡 방 알람이 울린다. 함께 찍은 사진, 감사의 메시지, 응원 메시지가 도착한다. 운전하는 중이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마음은 차올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강사 생활 12년의 마무리를 학생들이 아주 특별하게 해 주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슬픔이 아니라 기뻐서 흘리는 감동의 눈물. 




12년 동안 강의는 연극무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내가 수업을 얼마나 준비했는지 학생들은 귀신같이 알고 반응한다. 학생들과 소통이 잘 된 수업은 나 스스로 만족스러웠고, 그렇지 못한 수업은 실망스러웠다. 관객의 감동과 몰입이 무대 배우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처럼 수업 중 학생들의 반응은 수업에 대한 내 열정의 원동력이었다. 

오늘 저녁은 불 꺼진 연극 무대에서 내려온 느낌이다. 관객들은 모두 떠나버렸고 혼자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그렇게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에 카톡이 울린다. 학생들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나에게 보여준다. 또 눈물이 흐른다. 오늘은 이 눈물을 실컷 즐기고 싶다.  

나의 마지막 수업을 잊지 않겠다는 말, 사람 살리는 간호사가 되겠다는 다짐, 환자에게 특별한 간호사가 되겠다는 말, 내 앞날에 대한 응원, 감사함, 진정성 가득한 학생들의 마음을 차곡차곡 쌓아본다. 마지막 수업에서 많은 씨앗을 뿌린 것 같다. 학생들을 향한 나의 진심이 닿았다. 그리고 통했다. 오늘은 스스로 만족스러운 마지막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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