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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May 24. 2021

오늘도 한 판

 

‘한 판 뒤집어? 말아?’

아침부터 망설였다.

코로나 발생 이후 세 학기 째 정상 등교를 못 하는 고등학생 아들은 온라인 수업에 익숙해졌다. 아니 온라인 수업 대처 방법에 익숙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내 속마음은 복잡하다. 얼마 전 주민등록증 발급 통지서를 받았을 만큼 아들은 성장했다. 여전히 내 자식이지만 부모가 알려주는 세상살이 방법만이 유일하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아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시기다. 이런 아들과 대학입시에 대해 어설프게 말했다가는 내 말과 행동의 모순을 들키기 십상이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면서도 미친 듯 외우고 공부해서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엄마의 모순된 생각.

몇 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공부와 진로에 대한 전권을 아들에게 넘겼다. 우리 부부는 학원 선택, 공부방 등록 등 학습을 위한 경제적 지원과 기본적 의식주 생활만 챙겨주는 부모다. 결론적으로 고등학생 엄마 치고는 마음이 아주 편하다. 부모와 자식이 타인임을 인정한다. 남편 또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언제까지나 애들 인생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하게 둬야지”

남들 눈에는 대학입시도 마치지 않은 아이들에게 선택과 책임을 맡기는 것이 조금 이르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우리 부부가 이런 면에서 생각이 비슷하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대학입시에 무심하지는 않다. 고등학생 아들을 하루 종일 집에서 지켜봐야 하는 엄마로서 마냥 쿨하게 행동할 수는 없다. 특히 부모에게 희망 고문을 주는 성적일 때는 더욱 그렇다. 고등학교 입학 후 일 년 동안은 긴장감이 있었는지, 중학교 생활의 시행착오 덕분이었는지 아들은 내적 동기로 스스로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게임과 웹툰을 즐겼지만 본인 공부는 알아서 했기에 나의 교육방법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며 안도했다.



코로나로 긴 시간 동안 온라인 수업이 반복되면서 학생들의 긴장감은 더 떨어진 것 같다. 학생들은 각자도생의 시간을 보낸다. 어떤 학생은 노래방에서 수업을 듣다 선생님에게 들키고, 자느라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는 학생도 있다. 담임선생님은 결석처리되지 않도록 학생들을 조회시간에 입장시키느라 아침마다 분주하다. 우리 집 아들은 아침에 깨우면 조회 참석하고 알아서 시간 맞춰 과목 수업에 입장하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태블릿 PC로 수업을 들으며 아이는 곧잘 딴짓을 한다. 등교 수업을 하더라도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것은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30년 전에도 있었다. 수학 시간에 영어단어 외우고, 국어 시간에 자고, 야자 시간에 떡볶이 사 먹고. 나도 그랬다. 그 시절을 백 번 이해한다 치더라도 아들의 온라인 수업 듣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조금씩 화가 차오른다. 아마도 지난번 중간고사 시험성적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 앞에서는 의연한 척했지만 내 맘속에는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다.

‘니 공부하는 꼬라지 보니까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겠더라.’

하지만,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 않았다. 이런 피드백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답답한 마음이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입으로 바로 터져 나오지 않고 고맙게도 머리를 거쳤다 입으로 나오니 감사할 따름이다. 세월을 거치며 쌓인 내공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머리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오늘 난 아들과 한 판 해야겠다. 막내딸을 유치원 등원시키기 전, 딱 10분 동안 딴짓하는 아들에게 큰소리로 쏘아붙였다. 온라인 수업은 집중하기 정말 어렵다며 딴짓의 이유를 댔고 코로나로 인한 세상 탓을 했다. 엄마가 게임하지 마라 한다고 자신이 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도 아니라며 강한 눈빛으로 저항했다. 나도 지지 않고 아이 눈을 쳐다본다. '이 녀석아, 그런 눈으로 네가 엄마를 쳐다봐도 화도 나지 않고 무섭지도 않아. 네가 나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구나'라며 나도 두 눈으로 아들에게 레이저를 쏘았다.

“수업 제대로 듣지 않아도 돼. 하지만 수업 중에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야. 엄마가 몇 달을 그냥 지켜보고 있으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건 아니다. 점점 시간이 늘어나잖아. 네가 수업을 제대로 듣든 말든 그건 네 마음이야. 그런데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라고. 인생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니라고.”

거실 컴퓨터 앞에 있던 아이는 태블릿 PC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멈추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좀 더 퍼붓기로 결정했다. 몇 달 만에 퍼붓는 잔소리니 마음먹은 김에 독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제발 나가줘.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알아서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서둘러 막내딸을 데리고 현관을 나섰다. 유치원 셔틀버스를 태워 보낸 후 혼자 걸었다. 마음속 끓어올랐던 열을 식혀야 했다.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큰 아들이랑 한 판 했다. 알아서 하는 것 같아 지켜봤는데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서”

“잘했다. 피드백해주는 거라 생각하면 된다.”

“난 이제 요가 간다. 요가 없었으면 사춘기 두 아들 정말 힘들었을 듯.”

요가원으로 걸어가며 라디오를 들었다. 마침 흘러나오는 가곡은 ‘내 마음의 강물.’

흘러 보내야 했다. 화나고 속상한 감정, 미운 마음, 부정적 생각을 흘러 보내야 새로운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아침부터 내 안에서 끓고 있는 나쁜 감정들을 흘려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시바난다 요가로 땀을 흠뻑 흘리고 요가원을 나서니 어느새 마음이 순해졌다. 요가원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은 정말 다르다. 하루의 요가를 하기 전, 후의 내 몸이 다르듯 감정도 어디론가 흘러가고 새로운 기운이 채워졌다. 집으로 돌아가며 잠시 고민했다.

‘요 녀석, 좀 더 화난 척하고 점심도 차려주지 말까?’

좁은 시장 골목을 통과하는데 아들이 좋아하는 메뉴인 부대찌개 가게가 눈에 띄었다. 개업일이라며 떡과 사은품도 챙겨준다.

부대찌개 재료가 든 봉지를 들고 집에 도착한 나는 방에 틀어박혀 있는 아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지금 점심 챙겨 줘?”

답장이 없다. 우선 부대찌개 재료를 냄비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집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요 녀석아, 네가 좋아하는 부대찌개지롱. 엄마가 너 키운 지 이십 년 다 되어가니 널 좀 알지.'

난 시크하게 아들 방문을 열고 말했다.

“부대찌개 했는데 점심 차려?”

아들은 밍기적거리며 고개만 겨우 끄덕인다. 책상 위에는 빈 라면 그릇이 놓여 있었다. 벌써 점심 먹었냐고 물어보니 더 먹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웃음이 났다. 엄마 오기 전에 라면으로 점심을 자체 해결한 녀석이다. 부대찌개에 꼬리를 내린 건지, 부대찌개를 사 온 엄마에게 감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냉면 그릇 가득 부대찌개를 떠 밥 한 공기와 함께 식탁에 차렸다.

서먹한 분위기로 식탁에 마주 앉은 엄마와 아들. 점심식사로 라면까지 먹고도 엄마랑 식탁에 마주 앉아 부대찌개를 먹으면 우리의 한 판은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배불리 먹고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갖다 보면 서로의 말과 행동에 대한 인정과 후회도 각자의 몫만큼 할 것이다. 

여전히 못다 한 잔소리가 남았다. 

“아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해서 안정된 직업과 경제력을 갖고 사는 것도 좋지만 그 조직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때는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 사람들 대부분은 그 피라미드 안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면 삶에 만족하며 행복함을 느끼지.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도 아니더라.  부모로부터 맹목적으로 주입된 삶의 방법 말고도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는 것을 엄마도 나이 들어 깨달았단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지나온 길을 강요하지 않는 거야. 엄마가 공부와 진로의 전권을 너에게 넘겨준 것은 꼭 학교 공부가 아니어도 된다는 의미였지 현재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도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었어. 엄마도 알아. 무의미한지 아닌지는 지나 봐야 안다는 것을. 가끔씩 엄마가 너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해도 될까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어. 맞아. 이 불안은 엄마의 몫이지 너의 불안은 아닐 거야.”

내 생각을 자식에게 말할 때는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타이밍이다. 잘못 이야기하면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이미 자식에게 꼰대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자로서 못다 한 잔소리는 분위기 좋을 때 한 번 말해야겠다. 다음 한 판이 일어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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