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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May 13. 2021

써니는 복도 많지

12년 동안 해왔던 강사 일을 그만두겠다고 담당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낸 지 5일이 지났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메일은 제대로 도착했는지, 다른 이메일에 밀려 못 읽고 지나간 것은 아닌지....... 답장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 후 습관적으로 휴대폰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4시. 한숨 더 자야 하는데 정신이 맑다. 휴대폰을 뒤적이니 기다리던 답신이 드디어 도착했다.

이메일은 ‘사랑하는 O샘’으로 시작되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이자 자신을 지키려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결정이라며 나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성인이 된 두 자녀가 어렸을 때 워킹맘이었던 교수님은 내 마음을 온전히 헤아려주었다. 내가 답장을 기다렸던 5일 동안 교수님은 많은 생각을 했겠지만 최대한 나를 배려해 답장을 쓴 것이 느껴져 무척 고마웠다. 새벽에 읽은 메일에 짧은 답장을 회신함으로써 드디어 강사일은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정말 끝났구나.’라는 묘한 느낌도 들었다.

 



그날 저녁, 평소라면 잘 선택하지 않을 영화 한 편을 봤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의 영향일 것이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감독은 스물세 살에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홍상수 감독 아래에서 프로듀서로 5년 동안 일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의해 영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꿈을 접고 반찬가게를 해볼까 생각하던 시기에 윤여정 배우로부터 사투리를 가르쳐 줄 수 있냐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후 다시 영화 현장으로 돌아가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지 깨닫고 자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일 년에 걸쳐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마흔여섯에 첫 장편영화감독이 되어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세상에 나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에 콕 박히는 대사가 많았다. 영화감독은 나보다 한 살 많은 1975년생이다. 그래서일까? 내 나이쯤 되면 느끼는 지난 삶에 대한 성찰이 영화 곳곳에서 보였다.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써서 해”

“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고 쥐고 있으면 뭐해요. 버려야지 또 채워지죠.”

주인공 찬실의 하숙집 주인이자 영화 일을 했던 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늙은 어미인 복실(윤여정)의 대사다. 요즘 내 마음의 소리와 겹친다. 하루하루는 공들여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나머지는 흐르는 대로 살고 있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대사다. 한글을 잘 모르는 복실도  인생의 순리는 그 누구보다 충분히 느끼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일만 하고 살았을꼬!”

“일을 해서 벌어야지!”

주인공 찬실의 대사다. 젊은 시절 일이 꼭 필요했고 일을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던 내 모습이 보여 묘하게 공감되었다. 나도 찬실처럼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대학 내내 과외를 해서 학비와 용돈을 벌었다. 졸업하던 해 IMF로 발령 대기가 1년 이상 길어지면서 임시직 간호사, 대학 조교, 학원 선생님으로 돈을 벌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1999년 5월에 시작하여 꼬박 10년 동안 3교대 응급실 간호사로 돈을 벌었다. 힘들었지만 재밌고 만족스러웠다. 한 번의 육아휴직, 한 번의 퇴사와 재입사로 어떻게든 이어갔던 간호사 생활은 연년생 두 아들이 초등학생이 될 무렵 눈물을 머금고 그만두었다.

“외로운 건 그냥 외로운 거예요. 사랑이 아니에요.”

“자신이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별 게 아니기에 제일 소중한 걸 영화에 보석처럼 담는다.”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저는 늘 목말랐던 거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했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이 저를 꽉 채워줄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가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힘든 상황에서도 영화를 계속할지 고민하는 찬실에게 주위 사람들과 장국영 귀신(찬실 내면의 소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비 오는 날 혼자서 동네를 걷고 걸으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찾았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렇게 내린 결론이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며 연년생 두 아들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경제활동을 이어가고 싶었다.

 남편 직장으로 온 가족이 외국에서 생활했던 1년과 늦둥이 막내딸을 임신한 1년을 합해 딱 2년 동안 유일하게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던 시기다. 하지만, 두 달 후면 돈 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싫어서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겠지만 돈을 벌어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오롯이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다. 물론 남편이 직장에 나가 돈을 벌어오니 가능한 결정이다. 나의 가사노동, 돌봄 노동을 매달 누군가 현금으로 환산하여 눈앞에 보여주지 않아도 그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다. 마흔여섯이 된 지금에서야.


 “오직 하나에 목숨을 걸고, 오직 하나의 가치를 위해 비상하는 것은 위험 중의 위험이라고 합니다. 무언가 적극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고, 목숨을 걸었기에 거꾸로 지고하다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략- 니체의 ‘자기 보존이란 지금 자신이 처한 환경뿐 아니라 다른 환경, 크게 달라진 환경에서도 생존을 지속할  있는 능력입니다.”


손윗동서로부터 선물 받은  이진경의 <사랑할 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에서 읽은 내용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대한 해설서인데 요즘 나에게  힘이 되고 있다.

찬실이가 전구를 사러가며(빛을 구하기 위해) 어두운 길을 사람들과 함께 내려간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뒤에서 작은 손전등 빛을 비추며 하는 대사가 있다.

“우리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언젠가부터 내가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나에게 이 영화는 참으로 사랑스럽다. 찬실에게는 멀리 우주에서도 기도해준다는 귀신 장국영이 있고, 정 많고 찬실을 챙겨주는 복실, 소피, 김영이 있다. 나에게도 가끔씩 길을 잃고 헤맬 때 함께 있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부모, 형제는 물론 언제나 내 결정을 지지하는 남편과 아이들, 힘이 될 책을 선물해 주는 손윗동서, 복잡한 속마음을 한 시간 넘는 수다로 들어주고 시원 달달한 커피 기프티콘을 날려주는 친구.......

찬실은 타인에 의해 영화 현장에서 튕겨 나갔을 때 비로소 진짜 자신의 삶을 보았고 다시 영화를 만들 힘을 얻었다. 나 또한 임금 노동 현장에서 물러났을 때 오히려 그동안 못 본 삶의 소중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일도 해보고 도저히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일도 해봤다. 힘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고, 힘을 얻는 사람도 되어보니 알겠다. 써니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복도많지 #믿고싶은것 #하고싶은것 #보고싶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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