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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Apr 23. 2021

그때는 알지 못한 것들

 춥지도 덥지도 않은 4월 어느 날, 요가 수련원에서 몸을 움직이며 호흡을 더해갈수록 땀이 배어났다.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몸에 힘이 들어가고 숨은 거칠었다. 갑자기 눈앞에 섬광이 나타났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섬광.

‘이 증상이 또 생기네.......’

약 한 달 전 갑작스럽게 나타난 동일한 증상으로 놀란 적이 있다. 웬만한 급한 일 아니면 출근한 남편과 음성 통화하는 일은 없다. 뇌혈관에 이상이 생겼는지 걱정되어 남편과 통화할 정도였으니 나름대로 급한 상황이었다. 남편과 상의 후 집에서 증상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쉬었고, 집에 있던 작은 아들이 엄마가 걱정되어 침대 옆을 떠나지 못했다. 아들은 인터넷으로 한참 검색하더니 증상과 관련된 내용을 읽어주었다. 다행히 증상은 몇 분 후 좋아졌고 아들의 검색 내용을 다시 읽어보고 노안의 증상이라 받아들였다. 이후 눈에 좋다는 영양제를 구입해 놓고 며칠 챙겨 먹다 흐지부지되었다.

한동안 없었던 눈앞에 번쩍거리는 섬광증이 요가 수련 중 다시 나타났다. 눈을 감아도, 떠도 나타나는 증상이라 그냥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잠시 몸 움직이는 것을 그만둘까 고민했지만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계속 아사나(자세)를 따라갔다.

‘눈 영양제도 다시 챙겨 먹어야겠네. 노안의 증상이라면 더 자주 나타날 텐데 이제 평생 갖고 가야 하는 걸까?’

움직이는 몸만큼 머릿속도 바쁘게 돌아갔다. 몇 분 후 섬광증은 사라졌고 요가 수련도 마지막 아사나를 하고 있었다.

사실 마흔여섯의 내 몸은 노안만 온 것이 아니다. 수면의 질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 번 눈 감았다 뜨면 아침이었던 이십 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도 한밤중에 가까스로 잠을 깨 기저귀를 갈거나 우유병을 아이에게 물리고 나면 금세 잠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방광 탄력성이 줄었는지 새벽이면 어김없이 화장실을 간다. 볼 일 후 그대로 잠들면 좋은데 예전만큼 다시 잠자는 게 쉽지 않다. 온전한 잠자리 독립이 안 된 일곱 살 막내딸 때문인가 싶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잠들었다가도 늦은 밤 두 아들의 냉장고 여닫는 소리, 키보드 소리, 욕실 물 내려가는 소리에 쉽게 잠이 달아났다. 남편의 잠꼬대 소리에도 자주 깨서 화가 난다. 의도와는 다르게 난 나이 들면서 예민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예전에는 나이 들어 부부가 각방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질의 수면을 위해서라도 각방을 쓸 수 있겠다 싶다. 내가 그 나이가 되어야 경험을 통해 진정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마흔여섯의 나는 이삼십 대 사람들을 만나면 나이 든 느낌이고 오륙십 대 사람들과 있으면 젊어서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관계에서 느끼는 상대적 연령뿐만 아니라 몸이 말하는 나이를 경험 중이다. 나이 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체중 증가, 복부비만, 흰 머리카락 등 겉으로 보이는 것 외에도 당사자만 느끼는 몸의 변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의 변화는 늘 마음까지 변화시켰다.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과 몸 상태, 감정이 있다.

감각과 수면의 변화로 나이를 실감하고 있는 요즘, 오래전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워킹맘으로 한참 육아 고민이 많았던 결혼 3년 차 무렵, 나와 비슷하게 육아를 시작한 직장 선배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 선배도 서울에 시집, 친정 어른들이 없는 상태라 남편과 둘이서 육아에 허덕거렸던 시기다. 지방에 있는 시어머니가 흔쾌히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말하지 않은 부분에 서운함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육아를 갓 시작한 젊은 우리 눈에는 육십 대를 넘은 어른의 시간은 잉여시간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요즘, 나이에 따른 내 몸의 변화를 느끼면서 왜 선배의 넋두리가 떠올랐을까? 젊은 우리는 나이 든 부모의 마음과 몸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내 몸이 노화를 겪을수록 젊은 시절 어른들을 향해 쉽게 이야기했던 순간들이 자주 나를 부대끼게 한다. 때론 몸의 변화를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싶어 가능하다면 내뱉었던 나의 말들을 다시 주워 담고 싶다.

놀이터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함께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 나이 든 조부모들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늦둥이 엄마인 나도 이렇게 체력적으로 힘든데 저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두 아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다. 

“엄마는 너희 애들 못 키워준다. 아니 안 키워준다. 엄마도 온전히 1인분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너희들에게 ‘결혼해라, 자식 낳아’ 이런 말도 강요하지 않을게.”

이렇게 말은 해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미래 결혼한 아들의 부탁을 거절할 용기도 없다. 자식들은 알 수 없는 나이 든 부모의 시간, 몸, 마음.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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