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그냥 자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나 May 19. 2022

딸은 묻고 아빠는 답했다

2019년 늦가을 작은 방에 아빠와 딸이 마주 앉았다. 마흔넷 먹은 딸은 칠순 넘은 아빠의 말을 녹음하기 위해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아빠, 이제 녹음할게요.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돼요.” 

결핵을 앓다 어린 사 남매를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나의 할머니)와 홀로 사 남매를 키운 아버지(나의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인 나의 아빠. 1949년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태어난 아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가난과 서러움 가득했던 유년기를 보냈다. 성인이 되어 생활력 강한 엄마를 만나 4녀 1남을 두었고 난 그 자식들 중 둘째 딸이다. 칠십 인생의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인터뷰 요청을 하였고 흔쾌히 응해 주었다. 

 

아빠를 소개해달라는 나의 말에 우리 사이에 뭔 소개냐며 어색해하면서도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지. [고무신 속에 고무신 들어간다]. 옛날 사람들은 여자를 고무신에 비유했었지. 내가 딸이 많으니 사람들이 날 그렇게 놀렸어. 우리 집에 고무신 속에 고무신이 들어갈 만큼 딸이 많다는 거야. 난 어린 시절부터 놀림을 많이 받아 다른 사람이 놀리는 말이 정말 싫거든. 그래서 놀리는 사람에게 화내며 옆구리를 친 적도 있어. 하지만 지금은 딸 많은 아빠라서 자랑스러워” 

 딸 많은 아빠로 시작하여 가난에 찌들어 살았던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시절 초등학교 다닐 때 김OO 선생님이라고 있었는데 나보고 거지 문둥이 같다는 말을 했었지. 가난에 엄마 없이 꼬질꼬질했던 나한테는 어린 시절 큰 상처였어. 선생님이 내게 그런 말을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하지만 이런 기억도 있어. 박OO 담임 선생님이 나를 동네 이발소에 데리고 가서 깔끔하게 잘라주라고 주인에게 부탁했지. 몇 해 전 그 선생님을 찾고 싶었는데 벌써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일찍 못 찾아뵌 것이 너무 죄스럽더라. 지금도 이 두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어. 지나고 생각해보면 가난은 나에게 큰 가르침이었고 재산이었어. 가난은 내 마음을 굳게 하는 근원이었고 더 열심히 살게 한 원동력이었어.” 

 

내가 아빠로부터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아니다. 아빠는 칠십이 넘었지만 이야기할 때마다 어렸을 적 상처가 건들어져 분노하였고 고마웠던 담임 선생님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흘렸다. 아빠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희석될 수 있다면 자식으로서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더 들어야 할 것이다. 아빠를 설명하는 단어 딸과 가난. 

 

 

나의 첫 질문은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지, 필요한 조건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였다.  

 “먹고살만하면 돈에 대한 욕심, 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가족 건강하고 자신이 건강하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해. 내가 노력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바라지도 않아. 결혼 후 10년 넘게 광산 생활을 했어. 서른셋 정도 되었을 때, 퇴근 시간이 되어 어두운 갱도에서 동료들과 같이 걸어 나가던 중 사람을 태우는 광차가 지나가며 같이 걷고 있는 직장동료를 치어 즉사하는 것을 봤어. 그때 내 목숨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 광산 생활 11년 동안 그렇게 사람이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몇 번 봤지. 갱도 안에서 낙반에 끼여 사람이 죽을 뻔했던 것도 보았고. 퇴근해서 집사람한테 더 이상 출근 안 하겠다고 했어. 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안 나갈 수 도 없었지. 그다음 날 도시락을 싸서 광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생각했지. 삶이 전쟁이었어. 출근하기 싫어도 때려치울 수가 없었어. 먹고살아야 하니까”

 

살아있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건강하기까지 하면 더 이상은 바랄 게 없다고 하는 아빠의 말을 들으며 몇 년 전 삼차신경통을 진단받고 식사도 못할 정도의 극심한 통증으로 고생했던 아빠에게 건강하지 않은 삶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아빠는 건강하지 않은 삶은 외롭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웃으며 답했다. 삼차 신경통으로 고생할 때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조금만 통증이 덜해지면 살고 싶었다고 했다. 

 

칠십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어느 시기를 다시 살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어린 시절 아빠의 엄마(할머니)와 함께 했던 순간, 홀로 사 남매를 키운 아빠와의 추억, 결혼했을 때,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자식을 결혼시켰을 때 이런 뻔한 대답들을 예상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행복은 자라나는 거야. 고생이라 했던 것이 지나고 보니 다 행복이야. 특히 내가 힘들 때 맏딸이 나를 위로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 [난 행복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어. 지금이 제일 행복해. 노년이 가장 행복해. 내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평생을 몰랐어. 내가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이 있다는 것도 몰랐어. 둘째 딸이 나도 모르고 있던 것을 꺼내 주었지. 그래서 지금은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해.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없고 가난하다고 그렇게 비웃음 당하며 살았는데 지금 난 자식들 모두 출가시켰고 시까지 쓸 수 있어서 난 지금이 좋아. 행복의 반대말은 흔히 불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걷어내는 그 시작이 곧 행복으로 가는 길이거든. 안 좋은 일이 닥쳤을 때도 마음에 따라 행복이 될 수도 있어. 행복은 자기가 만들어 가기 때문에 뭐든 시작하면 행복이 될 수 있어. 난 요즘 시에 관심이 많으니까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나로서는 좀 더 많은 단어나 표현 등을 배우고 싶은데 생각만큼 쉽지는 않아. 내가 배운 게 짧으니까 아쉬워.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유년기, 청년기, 성인기, 노년기의 행복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느 시기의 행복을 선택하겠냐는 나의 어리석은 질문에 아빠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혼해서 몇 년 동안 애 키워서 학교 보내고 애들이 글 깨우칠 때 힘들었지만 행복했어. 난 우리 애들이 다 서울대 들어갈 줄 알았잖아. (아빠와 나는 크게 웃었다) 젊었을 때 힘든 것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노년기는 힘도 없고 힘든 일이 닥치면 금방 무너지기 때문에 노년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빠는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며 돈이 행복의 기준은 아니라고 했다.

“하루는 친구를 만났는데 서울 며느리가 땅 안 팔아 준다고 투덜투덜했다는 거야. 아버지가 땅을 팔아주면 애들 강남에서 교육도 시키고 유학도 시키고 싶다며 투덜거렸다는 거야. 그래서 친구한테 그 땅이 얼마나 물었더니 30억 정도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 재산 따라오려면 멀었구먼 그랬다. 그러니 나보고 땅을 얼마냐 사놨냐고 물어봐. 그래서 난 자식 하나에 최소 천억을 쳐도 난 오천 억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어. 둘이 허허 웃었지.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야. 난 이렇게 마음 통하는 자식을 가진 것으로 충분해”

 

아빠와 짧은 인터뷰를 진행하며 요즘 내가 사람들에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았다. 난 아빠의 영향을 받은 자식이었다. 아빠가 말한 삶이 아니라 아빠가 보여준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면 어떤 삶을 살면 행복할 것 같냐고 물었더니 이번 생이 힘들었지만 용서와 배려도 배웠고 남의 아픔도 공감할 줄 알아서 좋았다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이대로 살아도 돼. 대통령의 삶도 안 부러워. 무난하게 탈 없이 살았으니 됐어.” 

 

내가 아는 아빠의 삶은 결코 무난하지도, 무탈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이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꾸뻬씨의 행복여행]이 떠올랐다. 아빠가 생각하는 행복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보는 경험도 소중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빠의 육성을 녹음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들을 수 있는 소중한 보물을 얻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