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다.
보통 초등학교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 시간이 많아지는데 우리 아이들 학교는 좀 다르다. 이상하게도 월요일 하루, 3학년은 6교시 4학년은 5교시 수업을 한다. 월요일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첫째가 먼저 집에 왔다. 날이 더운지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가져와 베어 물고는 재빠르게 오늘 할 것을 물어본다.
“엄마, 오늘 수학 뭐해요?”
“수학익힘책 도형 단원 남은 거 풀면 되겠다.”
“영어책은 제가 골라서 먼저 읽을게요.”
수학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영어 공부할 것을 챙긴다. 오늘 공부 거리를 어떻게든 빨리 끝내려고 마음이 급한 탓이다. 다행히 오늘 공부할 것들이 그리 어렵거나 많은 양이 아닌가 보다. 평소보다 과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모습이다.
“다녀왔습니다.”
첫째가 공부를 하고 있는 중에 둘째가 도착했다. 둘째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오빠를 보자 곧장 현관에서 주방 냉장고로 향한다. 그와 함께 가방은 거실 바닥에 내리꽂힌다. 아주 자연스러운 동시 동작이다.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든 아이는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었다. 아이스크림을 가지러 가는 동안 100미터 단거리 육상선수였다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부터는 배부른 선비가 된다. 아주 느긋하다. 아이스크림은 녹여먹어야 제맛이라는 10세 어린이 인생의 철칙을 보여주려는 듯 아이스크림을 입 속에 넣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굴린다. 달콤함을 최대한 오랜 시간 느끼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공들여 먹는다. 둘째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도 하나 더 먹을 만한 시간 동안 거실 바닥에 엎드려 딩굴거리다 수학 문제집을 꺼내 든다.
수학 문제집은 왜 꺼냈을까? 문제집을 펼치지도 않았다. 한참 전에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쓰레기통에 넣고, 이어 시계를 흘깃 보더니 부루투룽한 목소리로 말한다.
“하, 벌써 두시야. 얼른 가야 돼.”
영어 학원 갈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둘째의 하교 시간이 오빠에 비해 1시간 늦는데 비해, 학원 등원 시간은 오빠보다 1시간 더 빠르다. 아이는 수학 문제집을 바닥에 펼쳐둔 채 학원으로 달려간다. 그사이 첫째는 오늘의 할 일을 모두 끝내고(그것도 평소보다 30분 정도나 빠르게) 빈백에 누워 게임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첫째가 학원에 가고 둘째가 집에 올 시간이다. 집에 온 둘째는 어느새 만화책을 손에 펼쳐 들고 있다. 저 만화책은 도대체 몇 번이나 봤는데 질리지도 않나 속으로 생각하며 슬쩍 말을 건네본다.
“오빠는 아까 공부 다 하고 영상 보더라.”
“헐, 진짜? 그렇게 빨리? 아이, 오빠는 쉬운 것만 해서 그래.”
‘그러니까 너도 빨리 시작하는 게 어때?’하는 나의 마음의 소리를 눈치챈 건지 못 챈 건지 손에서 만화책을 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고 거실로 내려와 책을 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엄마, 나 영어책 다 읽었어.”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내려와 영어 책을 읽고, 아까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들춰본다.
“아우, 이거 뭐야. 이거 뭔지 모르겠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스스로 해결이 안 되는 수학 문제가 있나 보다. 슬쩍 보니 전에 한 번 풀어보았던 문제다. 나는 스스로 고민해보고 해결했으면 하는 욕심에 푸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힌트를 주었다.
“이거 지난번에 했던 거잖아. 점에 번호를 붙여서 도형을 만들어 봐.”
둘째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반응이 영 시원찮다. 내가 그냥 정답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눈치이다. 그래도 군말 않고 문제를 응시한다. 잠시 뒤 내게 문제집을 내밀었다. 문제에는 정답인지 아닌지 모를 숫자 하나가 쓰여 있다.
‘이 녀석 내가 준 힌트를 이해한 건가? 그래도 일단 스스로 풀려고 노력은 했구먼”
왠지 모르게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정답을 펼쳐놓고 영원불멸의 채점 도구인 빨간 색연필을 꺼내 들었다. 둘째는 그런 나를 보더니 멀찌감치 소파에 떨어져 앉는다. 혹시나 정답을 잘못 확인할까, 정답지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답을 확인해본다. 답안지를 보는 눈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슥슥 빨강 동그라미를 그려 나가던 도중 손이 멈추었다.
‘이건… 아까 그 문제, 그 문제다.’
방금 전 둘째가 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던 그 문제였다. 아이가 문제지에 적은 정답은 9. 정답을 확인했으니 이제 채점을 해야 하는데 답안지에 선뜻 눈이 돌아가지 않는다.
‘정답을 맞혔을까?’
내 시험지도 아닌데 왜 긴장이 되는건지.
'문제 풀면서 모른다고 했는데, 이걸 틀리면 또 기분 상하겠지. 맞았으면 좋겠는네...'
‘9! 9! 9! 9! 9! 마음속으로 9를 간절하게 외쳐보면 9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9가 행운의 숫자이길 바라며 마음속으로 9를 백번 외치며 답안지로 고개를 돌렸다. 내 눈에 나타는 숫자는 8.
‘틀렸다!’
우리의 바람은, 기대감과 희망은, 배신감, 안타까움,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미간에 깊은 두 개의 세로 주름과 유독 곧고 짙은 눈썹이 무표정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한다. 이미 그녀도 현장의 상황을 알아차렸으리라. 어쩔 수 없다. 틀린 건 틀린 거다. 틀린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내가 잘 모르는 문제를 알 수 있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오히려 좋게 생각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지만 차마 입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중요한 건 틀린 문제를 다시 알아야 하는 거니까. 정신을 차리고 둘째를 다독여본다.
“서은아, 이리 와서 틀린 거 보자. 이건 왜 8이라고 썼어?”
“8개니까 8이라고 썼지.”
“8개? 이게 몇 개인지 세어봐. 이 수는 왜 쓰다가 말았어?”
“이거 아니니까.”
“이게 왜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 이거 아니니까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녀는 중얼거리듯 낮고 빠르게 말한다. 말에 날이 서있다. 45도 각도로 얼굴을 기울이며 입술만큼 표족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평면에 가까운 안면에 입술만 유독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기분이 안 좋을 때 그녀 특유의 얼굴이다.
“아, 아닌걸 어떻게 설명해. 그냥 아닌데.”
“그니까 이게 왜 아닌데? 왜? 설명을 해봐. 네가 왜 틀렸는지 알아야 나도 알려줄 수 있잖아.”
“아 진짜, 나도 몰라. 모르니까 틀렸지.”
둘째의 짜증 섞인 이야기를 듣던 나도 평정심을 잃었다. 순간 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결국 그녀에게 꽂는다.
“하... 야, 왜 짜증을 부려. 문제 틀린 건 너인데 왜 나한테 짜증을 내. 너 기분 안 좋다고 짜증 내니까 엄마까지 기분이 나빠지잖아. 네가 틀린 게 내 잘못이냐? 왜 네가 틀려놓고 엄마한테 화를 내! 아, 진짜... 야, 나도 안 해. 네가 틀린 거 네가 알아서 해.”
둘째가 성격이 온순하고 수용적이지 않은 건 누구 때문일까? 나는 남편을 닮아서 그런 거라고 항상 이야기하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저건 내 유전자라는 걸. 까칠함이라면 남들 못지않은 내가(가족 한정) 가만히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도 똑같이 날카롭게 딸아이의 말을 받아치고, 문제집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둘째는 소파로 가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버린다.
화를 쏟아내고 정신을 차리니 엎어져 있는 아이가 눈에 걸린다.
‘혹시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우나?’
소파에 엎어져 있는 녀석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자존심에 먼저 말을 걸지는 못하겠고 슬쩍 곁눈질로 아이를 살핀다. 그때 내 귀를 스치는 작지만 거친 소리.
“푸우… 드르르렁. 커어엉. 푸 푸우…”
비염이 있는 아이에게 나는 익숙한 이 소리.
1시간 뒤. 경쾌한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엄마, 틀린 거 다시 다 풀었어. 이거 봐줘.”
한 시간 전, 우리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