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쩌기저비 Feb 04. 2022

내 생애 최고의 수학여행 4


‘음주측정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섯 글자가 내 이마를 강타했다. 망할. 충전을 안 했다. ‘너 뭐야? 너 제정신이야? 너 정말!!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어제 그 난리를 겪고 왜 충전을 안 해! 왜? 왜? 왜? 도대체 왜?’ 이해인 수녀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건만 누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어야 했다. 그래야 기억이 났으려나.

충전기를 부랴부랴 콘센트에 꽂아보지만 이미 늦었다. 오늘의 일정을 위해서 더 이상 음주 측정을 미룰 수 없다. 하릴없이 음주 측정기를 가지고 툴레 툴레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기사님들은 어제 일을 농담 삼아,

“얘, 오늘 또 음주 뜨면 어쩐데?”

음주 측정기를 가리키며 가볍게 한마디 건넨다. 나는 뭐라 대꾸도 못하고 측정기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왜 이 불안한 마음은 어김없이 현실이 되는 건지. 처음 기사님이 내뱉은 숨에 측정기는 삐이이이- 소리와 함께 빨간불을 켠다.

“이거 역시 기계가 이상하다고. 우리 어제 같이 저녁 먹고 바로 잤는데, 술 먹었을 리가 있어? 기계가 문제네 문제.”

“줘봐요. 우리가 한 번 직접 해보게.”

기사님 손에 넘어간 측정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초록 불과 빨간 불을 번갈아가며 깜박였다.

‘정말 너란 놈. 망가뜨리고 싶다. 수학여행이 끝나면 다 부숴버리겠어.’


나는 어제처럼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겠다 싶어 학교 행정실에 전화를 했다. 어제 출발하면서 서울 숙소 근처 경찰서에 음주측정 협조 공문을 실장님에게 부탁했던 까닭이다. 실장님께 협조를 구한 경찰서 전화번호를 물었다. 실장님은 02로 시작하는 아홉 자리의 숫자 대신 예상치 못한 말을 전하셨다. 경찰서에서 우리가 급하게 요청한 탓에 인력을 보내기가 어렵다는 말과 함께 되도록이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했다는 거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야!

하… '되도록' 자체 해결이라 했으니 일단 경찰서에 전화를 해 본다. 결과는 지원 불가. 이제 더 이상 방법은 없다. 멍청한 기계에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기계를 가져와 조금이라도 더 충전하고 다시 측정을 해 보기로 했다. 10분 남짓 충전을 한 뒤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기사분들은 측정기에 숨을 불어넣었다.

'깜박깜박. 깜박깜박'

선명한 초록불을 확인하자마자 기계를 들고 숙소로 뛰어들어갔다.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아두고 돌아서며 충전이 되고 있는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보았다.




-




밤을 새우다시피 하루를 난 아이들은 어제보다 더 상태가 안 좋다. 극기훈련도 아닌데 걷고 있는 건지 질질 끌려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몇 백 년 뒤 미래 걷기 능력이 퇴화된 지구인 마냥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기를 힘들어한다. 기회만 보이면 여기저기 주저앉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수학여행 코스를 소화하지 못하고 숙소에 언제 들어가는지 물어보기만 수십 번. 아이들 컨디션에 맞춰 시간을 단축하며 겨우 일정을 마치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둘째 날 저녁은 호텔 석식이다. 보통 둘째 날 밤은 장기자랑과 댄스타임 등의 레크리에이션이 준비되어 있기에 일찍 숙소에 돌아오곤 한다. 좀 더 서둘러 숙소로 복귀하고 시간도 아낄 겸 석식을 호텔에서 먹는 일정으로 계획했다. 둘째 날 아침도 호텔에서 먹었던 터라 오늘 저녁 메뉴는 무얼까 기대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교사는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걸까?

‘이런 호텔 놈들…’

정말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어떻게 조식 메뉴랑 석식 메뉴가 똑같을 수 있지? 불고기 메뉴 하나 추가된 것 말고 판화를 찍어댄 것처럼 아침과 똑같은 메뉴 구성이다. 아니 이건 차라리 아침이 더 나았다. ‘아침에 재료를 쓰고 남은 재료로 저녁에 조리한 것입니다.’하고 아주 간판을 내 걸었다. 그나마도 양이 적어서 여기저기 비어있는 서빙 그릇과 보기에도 ‘나를 이제야 써 주다니 난 이미 생명력을 다 했단 말이오.’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며 죽어가는 모양새의 신선도가 떨어지는 음식들. 석식을 보고 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리라.(요즘엔 애들 입맛이 나보다 까다롭다.) 한껏 들뜬 채 내려와 식당에 줄을 서다 투덜거리며 다시 방으로 향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식당에 내려온 아이들과 다른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때, 갑자기 크고 낯선 한 마디 음성이 귓속에 꽂혔다.

“야! 이거 유통기한 지났다.”

“어디, 어디?”

“오늘 며칠이지?”

“어! 진짜야! 야 이거 어제까지야!!”

“우리 유통기한 지난 요거트 먹으라고 내 준거야?”

“헐, 대박.”

“아, 선생님 이 요거트 유통기한 어제까지예요. 이거 보세요.”

“아, 시발 나 이거 먹었는데.”

“아! 뭐야! 짜증나. 이거 먹고 배탈 나는 거 아냐? 아 개짜증.”

“이거 다른 사람이 먹다 남은 거 우리 준거 아니냐?”


한 아이로부터 시작된 소란은 주변으로 웅성웅성 삽시간에 전체로 퍼져갔다. 아이가 발견한 요거트에는 보란 듯이 당당하게 푸른 도장으로 어제 날짜가 찍혀 있었다. 혹시 몇 개만 그런 건가 싶어 남은 요거트를 모두 확인해 보았지만 모두 어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대형 사고였다. 혹시라도 유통기한 지난 요거트를 먹고 장염이나 식중독과 같은 질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수학여행이 끝나고 나는 경찰 조사를 받고 있을지도!

사실 유통기한이 하루 지났다고 해서 냉장 보관하던 요거트가 상하거나 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건 안다. 나도 집에서는 유통기한이 일주일 지난 요거트나 우유는 아직 유통기한이 일주일이나 남은 음료인 것 마냥 잘만 먹는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먹는 것과 호텔에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어떤 슈퍼에서, 마트에서, 식당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서비스한단 말인가. 이게 말이 되냐구 정말!


호텔에서 죄송하다며 요거트를 수거해가고 남은 요거트를 다른 음료로 교체해 주며 서비스 음료를 제공해주었지만 이를 수습하기엔 이미 늦었다. 몇 아이들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유통기한이 어제인 요거트가 나왔다며 뒤늦게 식당으로 향하는 아이들에게 핫뉴스를 전하기 바빴고,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요거트를 먹어버린 아이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신이 나를 가엾이 여겼던 걸까? 다행히도 요거트를 먹고 배가 아프다거나 탈이 난 학생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식당을 둘러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가의 이전글 내 생애 최고의 수학여행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