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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Nov 25. 2024

우울에 잠식되는 순간

계속되는 실패 후에

"여기로 내려와."


농장에서 치이고 퍼스에서 세컨비자가 되는 일을 구하기 어려울 거 같단 생각이 들 즈음 전에 같은 셰어에서 지내던 제훈오빠가 이야기했다. 퍼스(Perth)에서 남쪽으로 180km 떨어진, 2시간쯤 운전해 가면 있는 번버리(Bunbury)에 자리를 잡고 일을 구한 거였다. 이곳에 있는 육가공공장은 꽤나 큰 규모로 매일마다 큰 트레일러로 소와 양을 실어오고 있었고 해외로 수출도 하는 회사였다.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일자리가 많고 취업이 쉬울 거란 이야기였다. 번버리라는 동네는 어딘지도 모르는 전혀 기반이 없는 곳이고 그동안 지내온 생활권과 멀어져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세컨비자를 받기까지 시간이 여의치 않아 한가닥 희망을 품고 내려왔다. 숙소도 알음알음 소개해줘서 지내게 되었는데 육가공공장에 다니는 필리핀 아줌마 Amy와 오지(Aussie호주인) 아저씨 Frank 부부의 집이었다. 집의 방은 3개였는데 나는 그중 2층 침대와 서랍장이 하나 있는 작은 방에서 혼자 지내게 됐다. 수차례 해당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고 있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수입이 없이 시간만 내고 있던 터라 인근 쇼핑몰의 파트타임 도 알아봐야 했다.



-외향적인 성격
-일을 금방 배우는 편



그러나 연이은 구직실패로 주눅 들어 지내던 나는 이력서와는 달리 외향적이지 않았고 셰어방에서 은둔하다시피 지내곤 했다. 그러다 인근의 한 중국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서빙을 하게 되었다. 현지화된 중국음식들이었는데 전부 처음 들어보는 낯선 메뉴에 음료를 제조해 서빙하는 것도 익혀야 했다. 처음 2,3일 만에 메뉴판 가득한 20여 개의 메뉴 이름과 처음 보는 음식들을 매치해 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 대화나 단어, 음식 같은 것은 계속 연습하면 가능한데 끝까지 안 되는 게 하나 있었다. 손님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것이었다. "음식이 어떠세요? 다 괜찮나요? 필요한 것 있나요?" 식당 사장님은 내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고 꼼꼼하게 신경 써주길 바랐지만 나는 얼어 있었다. 왜인지 되도록이면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못했고 그저 뻣뻣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치울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와 하는 일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내가 본대도 당시의 나는 썩 마음에 드는 직원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 못 가 잘리고 말았다.



집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알음알음 소개로 들어온 주방보조일에 대타로 가게 됐는데 일본인 주방장이 혼자 하는 캐주얼한 식당이었다. 좁은 주방에서 같이 움직이다 보니 부딪힐 위험이 있어서 늘 뒤를 지나갈 때 "Behind you"를 외쳐 달라했고 간단하게 반납된 그릇을 추스려 식기세척기에 넣고 정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치를 보며 피해 다닐 뿐 말하는 것을 불편해했다. "Behind you"를 말하지 않았고 가난한 마음에 남은 음식들을 챙기느라 충분히 재빠르지 않았던 것 같다. 주방장은 나를 탐탁지 않아 했고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루 만에 통보받았다.



나는 할 일도 없었다. 마침 같이 내려왔던 교회 동생은 막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터였다.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더욱 가라앉았다. 시간은 이미 많이 흘러서 비자기한이 18주(4 달반)밖에 남지 않았다. 주 5일을 일한다 쳐도 세컨비자 88일을 채우려면 17주 하고도 3일을 일해야 하는데 이제 당장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세컨 비자는 생각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겠구나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암담하고 우울했다.

그런데 Amy아줌마가 풀이 죽은 나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출근할 때 함께 공장에 가보자고 이야기했다. 공장 인사담당자에게 같이 가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출근 시간은 새벽 6시. 평소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이지만 신경 써주는 아줌마가 고마워서 다음날 아줌마를 따라 차를 끌고 공장으로 향했다. 업무 시작 전 슈퍼바이저의 사무실로 나를 데려간 아줌마가 나를 소개했다.


"얘는 Eunice라고 나랑 같이 살아. 이력서를 여러 번 냈는데 한 번도 연락을 못 받았대. 일 좀 시켜줄 수 있어?"

"그래? 이력서를 냈었다고? 지금 이력서 있으면 줘봐."

"여기."

"음...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응? 뭐라고? 이렇게 쉽게? 단박에 된다고? 너무 쉽게 나온 그 대답에 얼떨떨했다. 난 지난 몇 주 동안 뭘 한 거지? 허탈함이 밀려왔다. 수없이 이력서를 냈던 것과 무관하게 그렇게 지인찬스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어쩌면 막 인력들이 더 필요한 찰나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세컨비자 취득 가능기한을 하루 앞두고서 겨우 일을 구하게 됐다. 딱 알맞은 찰나에.



나에게 필요했던 건 주눅 들지 않고 부딪혀보는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당하게 모든 일에 나서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지난 몇 달간의 호주 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탓에 마음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무너져 있었지만 딱 필요한 순간 딱 필요한 도움들이 있었다. 그렇게 순간을 지켜준 손 덕분에 호주에 남을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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