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론 1. From - 2) Raise

문제 인식

by 천원

국어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교실 안은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선생님이 말한 ‘동화를 재구성한 연극’은 반 아이들 사이에서 이미 작은 축제처럼 번지고 있었다.

“웃긴 버전으로 해볼까?”

“아니, 로맨틱한 게 더 좋아!”

“공포 버전으로 해도 된다더라!”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었다.

성준의 조도 창가 쪽에 모였다. 민수가 종이컵을 들고 나타났다.

컵 안에는 접어둔 쪽지가 여럿 들어 있었다.
“자, 이제 주제 뽑는다. 공정하게 하자.”
“그거 선생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거야?” 예림이 물었다.
“응. 동화 이름 적혀 있다더라.” 민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재훈이 손을 들었다. “그럼 내가 뽑아볼까?”
“아니, 내가 할래.” 민수가 손을 내밀었다. 재훈이 투덜거렸지만 물러섰다.

민수가 종이컵을 흔들었다. 쪽지가 살짝 삐져나왔다.

민수는 손가락으로 그걸 집어 들었다.
“나온다, 나온다…” 재훈이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
민수가 쪽지를 펼쳤다.
순간,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별주부전.”


“뭐?” 재훈이 고개를 내밀었다.
“별주부전이라고. 자라랑 토끼 나오는 그거.”
교실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가, 곧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진짜?”
“그거 완전 옛날 거잖아.”
“야, 동화는 원래 다 옛날 거야. 그보다 지루하게 생겼네.”
예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재밌게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민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좀… 식상하잖아.”
“야, 뭐 어때.” 재훈이 말했다. “그냥 토끼랑 자라랑 싸우게 만들면 되지.”
“싸우게?” 예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토끼가 간을 뺏기 싫어서 도망치잖아? 그걸 액션씬으로 만들면 재밌지.”
“그건 이미 원래 내용이잖아.” 성준이 중얼거렸다.
“뭐?” 재훈이 물었다.
“그러니까 그건 원래 이야기에 다 있는 거잖아. 그냥 그대로 하면 재구성이 아니라 복사잖아.”
“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재훈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연극은 그냥 재밌게 하면 되는 거야.”
“근데 수행평가잖아.”
“그래서 더 재밌게 해야지. 진지하면 망해.”
민수가 말했다. “토끼랑 자라 바꿔보는 건 어때? 자라가 도망치고, 토끼가 잡으러 가는 거야.”
“그건 더 이상하잖아.” 성준이 바로 말했다.
“왜? 재밌잖아.”
“그냥 역할만 바꾸면 뭐가 달라?”
“야, 너는 왜 자꾸 꼬여서 생각하냐.” 재훈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꼬여서가 아니라… 그런 건 그냥 반대로 만든 장난 같은 거잖아.”
“됐고, 일단 이걸로 하자. 시간 없잖아.” 민수가 손뼉을 쳤다.

“토끼랑 자라 역할만 바꿔서 대사 만들면 돼. 금방 끝나.”


“난 반대.”
성준이 조용히 말했다.

순간 분위기가 멈췄다.
민수가 눈썹을 올렸다. “뭐라고?”
“난 이걸로는 못 하겠어.”
“왜?”
“그냥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냥… 의미가 없어. 아무 생각 없이 바꾸기만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재훈이 웃었다. “야, 넌 수행평가를 철학시간처럼 하냐?”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뭐야, 재미있게 하자는데 왜 혼자 튀냐고.”
성준은 대답하지 않았고, 민수가 말없이 그를 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래, 뭐.” 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봐.”
성준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그럼 그냥 이걸로 하는 거야. ‘별주부전, 역할 반전 버전.’”

성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방을 싸 교실을 나왔다.



성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식탁 위에 던졌다.

하루 종일 이어진 연극 얘기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별주부전이라니.’

집 안은 고요했다. 아버지는 아직 퇴근 전이었고, 엄마는 학원 수업 중이었다.
성준은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 유리병 두 개가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청량 사이다’라는 라벨이 붙은, 요즘엔 보기 힘든 유리병 사이다였다.

병뚜껑 위에는 ‘돌리지 마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병따개… 어디 있더라.”
그는 서랍을 뒤적였다. 수저통 옆, 칼갈이 옆, 밀폐용기 아래.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병따개였다.

성준은 병따개를 손에 들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손잡이 부분엔 희미한 노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벗겨져 그 밑으로 갈색 녹이 얼룩처럼 배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오던 물건이 세월을 조금씩 흘려보낸 자국 같았다. 아버지가 이걸 샀던 게 생각났다.
‘야, 이걸 아직도 팔더라. 병따개 없으면 못 먹는 건데, 요즘 애들은 모르겠지?’
그때는 그냥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 말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성준은 사이다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은 반짝거렸고, 병 안에서는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진짜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병따개의 끝을 뚜껑 밑에 끼워 넣었다. 힘을 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금속이 미끄러지며 ‘딱’ 하는 소리만 났다. 뚜껑은 그대로였다.

“아, 진짜 왜 이렇게 안 돼.”
성준은 병을 세게 눌렀다. 병따개를 다시 끼우고, 손잡이를 더 강하게 당겼다. 이번에는 병이 미끄러지며 책상에 ‘쿵’ 부딪혔다. 사이다가 살짝 넘쳤고, 거품이 병목에 맺혔다.
“아, 망했다…”
성준은 넘어진 사이다를 집으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어렵냐고.”
잠시 멈춰 서서 뚜껑을 바라봤다. 어째서 이 작은 걸 여는 게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그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이번엔 병을 단단히 잡고 천천히 각도를 조정했다. 병따개의 끝을 뚜껑 밑에 비스듬히 넣고, 손잡이를 위로 밀어 올렸다.

‘틱.’
금속이 마찰하며 미세한 소리를 냈다. 손끝에 미묘한 떨림이 전해졌다.
‘딱.’
짧고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병뚜껑이 튕겨 올라 싱크대 쪽으로 날아갔다.

순간, 사이다 안에서 거품이 터졌다. 탄산이 병목을 따라 올라오며 작은 기포가 터졌다.

‘쉬이이—’ 하는 소리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성준은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그 소리가 마치 학교에서 친구들이 떠들던 소리와 겹쳐지는 것 같았다.

“됐다…”
그는 병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톡 쏘는 사이다의 맛이 입안을 자극했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시원하면서도 묘하게 쓰렸다.생각보다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이걸 따는 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병따개를 내려놓고, 떨어진 뚜껑을 주워 들었다. 둥근 금속 안쪽에 하얀 고무 패킹이 붙어 있었다. 그걸 만지자 약간의 끈적함이 느껴졌다.병따개는 책상 위에 누워 있었다. 금속 부분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을 보고 있으니 낮에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재훈의 “그냥 바꾸면 되잖아.”
민수의 “그게 뭐 어때.”
예림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얼굴.
그리고 자신이 조용히 했던 말. “난 반대.”

그 한마디가 그렇게까지 이상했을까? 성준은 병을 들고 의자에 기대 앉았다.
“그냥 다들 하자는 대로 하면 되잖아.”
머릿속에서 친구들의 말이 다시 울렸다.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기 싫었을까.

그는 사이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탄산이 목구멍을 찔렀다. 기포가 올라오는 걸 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가 떠올랐다. 계속 참다가, 억지로 맞춰주다가, 결국 터져버린 기분. 병따개로 병을 딸 때 느꼈던 그 짧은 ‘딱’ 하는 순간이, 어쩐지 낮의 자신과 겹쳐 보였다.


“아빠, 이거 되게 어렵더라.”
혼잣말처럼 내뱉은 목소리는 부엌 안에 조용히 맴돌았다. 냉장고의 모터 소리가 낮게 깔리고, 그 위로 사이다 기포가 터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성준은 그 소리를 들으며 병을 비웠다.

사이다의 단맛이 혀끝에 남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뻑뻑했다.











왜 기존의 역할 이해가 불충분한가?


(1) Root - 근본

앞선 단원에서 우리는 역할을 형태와 규칙, 목적, 방식, 경계라는 틀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틀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틀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고 어떤 관점 속에서 고정되었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존 학문은 역할을 사회적 기능이나 타인의 기대에 대한 반응으로 정의했다. 이런 설명은 사회 질서를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시작부터 집단 중심에 머물렀다. 개인의 목소리나 경험은 주변부로 밀려났고, 교사·학생·직원 같은 전형적 역할만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그 결과 역할은 고정된 규범으로만 이해되었고, 개인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체험하는지는 가려졌다.

근본을 묻는 일은 회고를 넘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을 흔들어 보는 일이다. 이렇게 출발점을 다시 살펴야 다음 단계의 질문을 열 수 있으며, 새로운 탐구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


(2) Ask - 의문점

근본을 점검하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라온다. 집단적 틀만으로는 개인의 다양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규범을 공유해도 사람마다 역할 수행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교사들은 같은 교실에서 서로 다른 수업 방식을 택하고, 리더들은 같은 지위를 두고도 전혀 다른 리더십을 발휘한다. 학생이나 직원 역시 같은 규칙 속에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만약 역할이 ‘기대된 행동’으로만 규정된다면, 이 차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기존 정의가 놓치고 있는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의문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동일한 틀에서 서로 다른 결과가 반복된다면, 우리는 그 차이를 설명할 더 깊은 해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질문은 곧 다음 단계, 현실이 보내는 신호를 읽는 길로 이어진다.


(3) Indicate - 신호

의문이 제기되면, 현실은 마치 답을 주듯 여러 신호를 보여준다. 이 신호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징후다.


조직에서 직원들이 무기력해지거나, 학생들이 수업에 무관심해지는 장면은 흔히 개인의 태도 문제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는 역할이 실제 조건과 맞지 않는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규범에 따라 주어진 역할이 개인의 동기와 충돌할 때, 소외와 갈등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직장에서 창의성이 억제되고, 학교에서 자발성이 사라지는 현상은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신호들은 기존 관점이 복잡한 현실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신호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 설명의 균열을 보여주며, 이제는 문제를 분명히 진술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일깨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명확화의 단계로 나아간다.


(4) State - 명확화

신호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면, 문제를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모호하게 넘어가면 탐구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역할 개념은 사회적 기능과 규범적 요구를 중심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그 안에서 개인의 해석, 가치, 경험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역할은 추상적인 규정으로만 남아 현실을 설명하는 힘을 잃었다. 교사나 학생, 직장인의 실제 수행은 훨씬 복잡한데, 기존 정의는 이를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개인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했고, 연구도 그 빈자리를 메우지 못했다.

문제를 명확히 진술하는 순간, 기존 정의가 가진 한계는 더 이상 감춰질 수 없다. 이제 남은 과제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을 드러내는 일이며, 그것이 다음 단계로 이어진다.


(5) Expose - 드러냄

마지막 단계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겉으로는 안정과 질서처럼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현실이 숨어 있다.


사회는 역할을 통해 체계를 유지했으나, 동시에 개인은 억압과 차별을 경험했다. 특정 집단에게는 제한된 역할만 주어지고, 다른 집단은 더 많은 기회를 차지했다. 이런 불평등은 제도와 문화 속에서 고착되었고,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역할은 질서의 언어로 설명되었지만, 실제로는 불균형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감춰진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영향은 개인의 삶과 집단의 구조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숨겨진 문제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기존 관점에 머물 수 없으며, 이제 역할에 대해 전혀 새로운 질문을 열어야 한다.



¶ 역할은 도구다 - 병따개


병따개는 길쭉한 금속 막대 끝에 갈고리 모양이 달린 단순한 도구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불과하지만, 단단히 잠긴 병뚜껑을 여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겉보기에는 작고 평범해 보이지만, 작은 힘을 큰 효과로 바꿔내는 지렛대의 원리가 숨어 있다. 맨손으로는 열리지 않는 병뚜껑도 병따개를 사용하면 쉽게 열린다. 그래서 병따개는 ‘작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도구’로 자리매김해 왔다.


역할은 이 병따개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다. 첫째, 병따개가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꼭 필요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하듯, 역할도 일상에서는 사소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둘째, 병따개는 작은 손목의 힘을 효율적으로 전달하여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역할이 개인의 작은 행동을 사회적·집단적 차원에서 의미 있는 변화로 확장시키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 학생이 맡은 작은 역할 하나가 전체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 셋째, 병따개가 없을 때 우리는 병뚜껑을 열기 위해 손을 다치거나 불필요한 힘을 쓰는 것처럼, 역할을 인식하지 못하면 개인은 혼란과 갈등 속에 에너지를 낭비한다. 또한 병따개가 식탁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이어주고 분위기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듯, 역할은 공동체의 흐름을 열고 관계의 문을 열어준다. 결국 병따개가 있어야 술자리나 모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역할은 개인과 사회가 원활히 작동하게 하는 필수 장치다.


병따개는 단순하지만 유리병의 뚜껑을 여는 데 필수적인 도구이고, 역할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역할을 크기나 겉모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 어떤 순간에 힘을 발휘하느냐다. 병따개가 닫힌 병을 열어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것처럼, 올바른 역할 인식은 개인의 가능성과 사회의 길을 열어준다. 따라서 우리는 역할을 다시 들어 올려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주어진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전환과 올바른 사용법을 통해 더 큰 세상을 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역할은 병따개처럼, 작아 보이지만 삶의 문을 열어주는 결정적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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