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의 틀
교실 벽 한쪽에는 커다란 나무 액자가 걸려 있었다. 나무색이 살짝 바래 있었고, 구석에는 먼지가 엷게 쌓여 있었다. 그 안에는 반 전체가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 들어 있었다. 2학기 초 조별활동을 마치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누군가는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하고 있었고, 어떤 애는 귀엽게 혀를 내밀고 있었다. 가운데에 선 선생님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그 사진 앞을 지나며 자기 얼굴을 찾아보았다. “야, 나 여기 완전 잘 나왔지?” “너 코 되게 크다.” “와, 나 옆에 서 있어서 운 좋았다.” 그런 대화가 들릴 때마다 성준은 그 옆을 그냥 지나쳤다.
어느 날은 민수가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야, 우리 이때 진짜 재밌었지?”라고 했다. 성준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이 정말 재밌었던 날이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다 같이 찍자” 하니까 찍었고, 다들 웃으니까 자기도 그냥 웃었을 뿐이었다. 사진 속 자신의 웃는 얼굴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진짜 자신 같지가 않았다.
그날도 수업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 교실이 시끄러워지는 틈에 성준은 혼자 그 액자 앞에 섰다. 액자 아래에는 하얀 종이로 적힌 문구가 붙어 있었다.
“우리 반의 행복한 순간.”
글씨체가 둥글고 귀여웠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반장이 썼을 가능성이 컸다. 성준은 그 글씨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행복한 순간이라…”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날이 그렇게 행복했을까? 그냥 다 같이 서서 웃고, ‘찰칵’ 소리 나니까 끝이었는데.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맨 앞줄에 민수가 있었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성준의 어깨 위엔 민수의 팔이 얹혀 있었다. 그 옆에는 예림과 재훈이, 그리고 다른 반 친구들. 반 전체가 가득 찼다. 그런데 사진 속에서 성준의 표정은 딱히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뭔가 덤덤했다. 그는 자신이 웃고 있는 얼굴을 보고도 그게 자신이 아니라 낯선 사람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창가 쪽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야, 매점 가자!” “야, 돈 있냐?”
아이들이 들썩이며 우르르 교실 밖으로 나갔다. 교실 안에는 금세 조용한 공기만 남았다. 커튼이 살짝 흔들렸고, 바람이 들어와 액자 위 먼지를 살짝 날렸다. 성준은 의자에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햇빛이 창을 통과해 액자 유리에 반사되고 있었다. 그 빛이 잠시 그의 얼굴을 스쳤다. 유리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사진 속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그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웃고 있는 두 개의 얼굴. 하나는 사진 속, 하나는 지금. 둘 다 진짜 같지 않았다.
“성준아.”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돌아보니 민수가 손에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국어 수행평가 공지 붙었대.”
“수행평가?”
“응. 이번엔 연극이래. 동화 재구성해서.”
“연극?”
성준은 눈을 깜빡였다.
민수는 칠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A4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국어 수행평가 안내>
‘조별로 동화를 재구성해 연극을 만들어 발표하세요.’
- 진행 방법 및 평가 기준
1. 무작위로 뽑은 동화를 선정하여 재구성하기
2. 기존의 동화와는 다른 주제를 전달할 것
3. 주제를 명확히 전달할 것
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는?”
“뽑기로 정한대. 근데 우리 둘은 같은 조래.”
“진짜?”
“응, 그리고 예림이랑 재훈이도 같이래.”
성준은 속으로 ‘또 애매한 조네’라고 생각했다. 예림은 말수가 적고, 재훈은 장난이 심했다. 그리고 민수는 늘 분위기를 주도하지만 금세 다른 일에 관심을 돌렸다.
민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잖아. 이번엔 좀 재밌게 하자. 맨날 진지하게만 하면 피곤하잖아.”
성준은 애매하게 웃으며 “그래, 뭐.” 하고 대답했다.
민수는 손에 든 종이를 흔들며 “그럼 뽑기 할 때 봐.” 하고 교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교실이 조용해졌다. 성준은 다시 액자를 바라봤다.
사진 속의 민수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자신도 억지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는 몇몇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고 있었다.
공이 굴러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그리고 교실 안의 고요함.
그 모든 게 섞여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잠시 후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다시 교실로 들어오며 웅성거렸다.
“야, 이번에 발표 형식 바뀌었대.”
“진짜?”
“연극이라니까.”
선생님이 들어오며 말을 이었다.
“이번 연극은 단순히 여러분들이 뽑은 동화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단, 선생님이 제시하는 동화 중 하나를 뽑게 되며, 단순히 동화를 그냥 따라 할 경우에는 감점이 됩니다.”
성준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다시 사진 속 얼굴이 떠올랐다. 카메라 앞에서 웃던 그 얼굴. 그날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연극을 할 때도 같은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다들 웃으니까 나도 웃고, 다들 하니까 나도 하는 식으로.
수업이 끝난 뒤, 민수가 다가와 말했다.
“야, 어떤 동화가 있을지 예상되냐?”
성준은 연필을 돌리며 대답했다. “아니.”
“교과서에서 다뤘던 동화들 중에 있는 거 아냐?”
“아마도.”
민수는 그렇게 말하고 친구들과 나가며 웃었다.
성준은 다시 액자를 바라봤다. 사진 속 웃는 얼굴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 안에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진짜 같지 않았다.
‘또 그냥 웃는 척, 어울리는 척하면 되겠지.’
그는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책상 위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또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성준은 고개를 숙였다. 떨어진 연필을 주워 들고 손가락으로 굴렸다.
잠시 연필 끝을 보다가 액자 쪽을 다시 바라봤다.
벽에 걸린 사진 속 아이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변하지 않는다.
언제나 똑같이, 고정된 채로.
(1) Form - 형태
역할은 오래전부터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개인과 집단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었다. 기능론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행동 패턴으로, 상징적 상호작용론은 타인의 기대에 대한 반응으로 역할을 정의했다.
이런 정의는 개인이 경험하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거리를 둔다. 교사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 학생이 ‘배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단순화될 때, 현실의 다양한 양상은 사라진다. 역할은 원래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만, 그것을 집단 중심으로만 설명하면 개인의 주체성과 변주 가능성이 가려진다. 형태를 강조한 기존 설명은 기본 구조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다양성을 누락시켰다. 형태에 주목한 설명은 기본 틀을 드러내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그 틀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틀의 기원’으로 시선을 옮길 필요가 있다.
(2) Rule - 규칙
역할 개념에는 언제나 규칙이 동반된다. 사회는 일정한 기대와 기준을 정해 개인이 그에 맞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기능주의 전통에서 역할은 곧 ‘사회적 기대의 집합’이었다. 교실에서는 발언 규칙이, 직장에서는 보고 체계가 그런 예다. 규칙은 개인의 행동을 안정시키지만, 동시에 다양성을 제약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전제는, 실제로는 다른 방식으로도 잘 수행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한다. 규칙은 질서를 지키지만, 개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역할을 해석하는 길을 좁힌다.
규칙 중심의 이해는 질서 유지에는 유효했지만, 개인적 해석의 여지는 좁게 남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왜 같은 규칙이 다른 결과로 나타나는가’라는 의문이 생겨난다.
(3) Aim - 목표 지향
역할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목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학문은 오래전부터 이 목적성을 강조해 왔다.
교사의 역할은 ‘지식 전달’이라는 목적에, 학생의 역할은 ‘학습 성취’라는 목표에 맞추어 설명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언제나 외부에서 부여된 목표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개인이 역할 속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고, 어떤 방향성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지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목적은 역할을 정당화하는 힘을 가졌지만, 동시에 개인의 내적 지향을 가려버린 한계도 있었다.
목적에 대한 기존 설명은 방향성을 제시했으나, 개인의 내적 지향과 연결되지 못했다. 결국 방향성이 가려진 지금, 우리는 다시금 역할의 본질적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4) Mode - 상황과 방식
같은 역할이라도 항상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기존 연구는 이러한 다양성을 체계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교사는 강의식, 토론식, 프로젝트식 등 여러 방식으로 수업을 이끌 수 있고, 리더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학문적 정의 속에서 이런 차이는 부차적 현상으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역할은 고정된 규범처럼 그려지고, 방식의 변주는 본질적인 요소로 인식되지 못했다. 방식의 다양성은 부차적인 현상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역할은 이 차이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이러한 간극은 다음 단원에서 다뤄질 문제 제기의 출발점이 된다.
(5) Edge - 경계
역할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는 경계를 만들어 낸다. 이 경계는 책임과 권한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교사와 학생, 의사와 환자,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의 역할은 모두 경계 위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경계가 너무 뚜렷해지면 상호 이해가 단절되고, 지나치게 흐려지면 책임이 모호해진다. 기존의 설명은 경계의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데 머물렀다. 경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떤 긴장과 가능성을 경험하는지는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경계 개념은 역할의 구분을 보여 주었지만, 그 안에서 경험되는 긴장과 균형은 설명하지 못했다. 바로 이 부족함 때문에, 우리는 역할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액자는 그림이나 사진을 둘러싼 틀로, 내부의 형상을 일정한 형태로 보여주고 정돈하는 역할을 한다. 틀은 단순히 외형을 고정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보는 이의 시선을 통제하고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역할도 사회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감싸는 틀이다. 역할의 규칙·목표·상황·방식·경계는 개인의 행위를 정해진 모습으로 드러나게 한다. 이때 역할은 개별적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기대와 맥락 속에서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역할을 액자처럼 본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장치로만 보기보다 사회가 기대하는 행동의 틀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틀 안에 무엇을 담을지는 아직 논할 수 없지만, 최소한 틀의 존재가 우리의 행동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관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