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비가 하루 종일 교정의 먼지를 눌렀다. 종례 종이 가라앉자 회색 표지의 두툼한 서류철이 성준 책상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표지 모서리는 눅눅했고, 투명 포켓 사이로 업체별 제안서, 가격표, 시험 성적서, 착용 안내문이 층층이 비쳐 보였다. 잉크와 본드 냄새가 섞여 났다.
맞은편에서 지영이 표지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교복 평가 항목들이 눈에 밟혔다.
“옷감 재질, 교복 완성도, 업체의 신뢰도….”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부장님, 이걸 왜 교사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도 수업 준비 밀렸는데요.”
성준은 탁상시계를 한번 보고 서류철을 반으로 접어 눌렀다.
“오늘은 해야 하는 선까지만 해요. 우리가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평가를 진행하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 선이 어딘데요?”
“학생이 입어 보고, 학부모가 만져 보고, 그 과정을 우리가 보게 만드는 것. 그리고 정리. 거기까지.”
그는 저녁 회의실을 예약했다. 직사각 테이블을 ㄷ자로 놓고, 벽면 화이트보드 옆에 이동식 행거 두 줄을 세운다. 카펫은 비에 젖은 공기를 먹은 듯 눅눅했고, 형광등은 살짝 윙— 하고 떨었다. 테이블 위 클립보드에는 간단 평가표가 얹혔다. 업체의 신뢰도, 품목별 단가 비율은 이미 정해진 것이지만 AS 계획 및 소비자 불만사항 처리는 향후 결정될 일이라 그저 업체에서 잘 처리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어 결국 교사, 학생, 학부모는 옷감의 재질, 교복의 완성도를 봐야 한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젖은 우산들이 현관 매트 위에서 물을 똑똑 떨궜다.
이름표를 단 학생들이 사이즈표를 확인하며 자리에 앉았고, 학부모 몇은 종이컵 커피를 들고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제습기 팬이 낮은 숨소리처럼 돌아갔다.
첫 학생이 상의를 입고 팔을 들어 올렸다. 겨드랑이 봉제선에서 ‘슥’ 하는 마찰음이 났다.
“올릴 때 조금 껄끄러워요.”옆의 학부모가 소매 안쪽을 손끝으로 훑었다.
“박음질은 단단한데, 실밥 마감이 뻣뻣하네요. 이건 쓸릴 수 있겠어요.”
성준은 '업체 1. 마감 거칠다'이라고 적었다.
다음 학생은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어 보았다.
“얕아요. 폰이 튀어나올 것 같아요.”
체크.
또 다른 학생은 앉았다 일어섰다를 열 번 반복하다 세 번째쯤 허벅지를 잡았다.
“앞쪽이 당겨요.”
체크.
창가 쪽 학부모가 셔츠를 형광등 아래 들어 비쳐 보이며 말했다.
“비침이 좀 있네요. 속옷색 신경 쓰겠어요.”
체크.
지영은 한쪽에서 업체 2의 교복을 입은 학생에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켰다. 이마에 잔머리가 붙었다. 그러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왜 우리가 여기까지 해야 하는지는, 계속 모르겠어요.”
성준은 클립보드를 넘기며 짧게 답했다.
“나도 그래요. 그래서 오늘처럼 선을 그어 두는 거죠. 이 선 안은 우리가, 바깥은 다른 자리에서.”
학생들은 포즈 대신 움직임을 반복했고, 돗바늘 같은 작은 동그라미들이 평가표에 차곡차곡 박혔다. 누구의 취향이 아니라 체감이 모였다. 회의실의 공기는 사람들의 숨과 젖은 천 냄새로 묵직해졌고, 클립보드가 넘겨질 때마다 종이가 마찰음을 냈다.
회의 종료. 성준과 지영은 학생과 학부모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정리했다. 성준과 지영은 띠지가 군데군데 붙여진 제안서를 A4용지 박스 두 개에 넣고 들어 교무실로 향했다. 박스를 한숨 쉬듯 내려놓고, 한숨처럼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영은 키보드를 토닥토닥 쳐서 만든 협의록을 성준에게 확인받고, 결재를 요청했다. 성준도 으레 그렇듯 결재 버튼을 눌렀다.
시간이 흘러 제안서 심사 기간이 종료됐다. 최종 평가 기안을 업로드하고 이를 행정실에 알리자, 행정실장님은 난색을 표했다. 업체 5곳 중 3곳이 부적합 처리된 결과를 업로드하여 업체가 이를 볼 경우, 업체가 학교로 전화를 하여 민원 제기를 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소송까지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협의회 내에서 상의되고, 평가 결과는 수정할 수 없다. 그저 평화롭게 일이 진행되길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업체에게는 그 해 수입과 관련된 일이니 쉽게 물러나진 않겠지... 성준은 행정실에서 나와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한숨을 쉬었다.
다음 날, 성준이 식사 후 교무실에 들어오자 지영이 울며 이야기했다.
"부장님, 업체 세 군데에서 전화가 왔어요. 한 업체는 저보고 우리 교복이 왜 부적합 처리된 건지 설명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업체는 제 통화 내용을 녹음하는 소리도 들렸어요."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왜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성준은 지영을 먼저 진정시키고, 교복선정위원에서 간사의 역할을 떠올렸다. 회의록을 작성하고, 기안하는 간사는 교복선정위원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평가 결과만 취합할 뿐, 평가 자체를 하지 않기에 지영은 평가 내용에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성준이 지영 대신 직접 업체에 연락을 취할 수도 있으나, 이는 평가자가 직접 연락을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준은 다른 사람의 역할을 자신이 대신했을 경우 나타나는 부작용을 이미 경험했기에 지영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돕는 것에 집중했다.
"지영 쌤. 쌤은 일단 평가자가 아니니, 평가 결과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에요. 업체에 어떻게 이야기했어요?"
"일단 알아보고 연락드린다고 이야기했어요."
"알았어요. 우선, 협의록의 평가 내용을 세부적으로 말해줄 수는 없어요. 협의회 내부의 내용이니까. 대신 교복 평가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관계자는 학생과 학부모님이었어요. 그분들이 실질적인 소비자니까. 맞죠?"
"네."
"우리는 현실적인 범위 내에서 그분들의 요구 사항을 반영하는 역할이고, 이걸 제안서와 교복 샘플 평가로 진행한 거예요. 그러니 평가 결과에 대해 변호하는 응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 과정의 객관성을 업체에 설명하면 돼요. 낙찰되지 않은 업체 중 부적격 평가를 받은 업체는 평가 결과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다기보다는 '평가가 객관적이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거예요. 이해되나요?"
"네. 알겠어요."
"평가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이야기와 함께, 교복의 실제 구매자인 학생과 학부모님의 의견을 점수로 나타낸 것이고, 계약 조건에 표기된 점수 이하의 점수를 부적격 처리한 것일 뿐 업체의 교복에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면 업체는 섭섭할 수는 있지만 평가 과정에 대한 객관성을 수용할 거예요."
"만약에 수용하지 않으면요?"
"그러면 교감 선생님께 보고 드려 도움을 요청해 봅시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진행되진 않을 것이니 걱정 마요. 업체에 연락하고 나면 얘기해 줘요."
이후 공강 시간이 서로 겹치지 않아, 다음 날이 되어서야 성준은 지영과 대화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 두 교복 업체는 다소 섭섭하고 씁쓸한 감정을 말로써 표현했으며, 다른 업체는 예상외로 빠르게 수긍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제와 달리 많이 진정된 듯한 지영은, 성준에게 간식창고 안 과자를 주며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교복 업무가 학교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사실 불만이 많아요."
"네?"
"이 업무, 내 생각에도 교사가 사실 맡을 업무가 아니에요."
"그런데 별로 불만 없으신 것 같던데요?"
지영은 믹스커피 봉투를 뜯으며 성준에게 이야기했다.
"당장 불만을 가져도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나름 합리적으로 체계를 짜서 길라잡이 형태로 업무 진행 과정을 교육청에서 책자로 안내하지만, 선생님들이 교과서 보고 교재 연구하고 생활 지도하는 시간 빼서 이 책을 봐야 한다는 게 교육적으로 맞지는 않아요. 이렇게 책만 갖다 주는 게 효율적인 업무 하달인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왜 계속 교복 업무가 학교에 남아 있는 거예요? 아니면 행정실로 가면 되지 않아요?"
"길라잡이에 보면, 입찰 단계에 직접 관여하는 업무 담당자는 교복 업무를 맡을 수가 없다고 되어 있어요. 행정실이 딱 그 상황이죠. 그리고 행정실도 우리와 입장이 비슷해요. 원단 재질이나 재봉질 수준을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서."
성준은 지영이 줬던 과자 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그리고, 교복 업무만이 문제는 아니에요. 교육청이나 교육부에게는 교사 자체의 역할보다는 정책 수행, 에산 집행 역할이 더 중요하니까요."
"근데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도 자녀가 다 있으실 거잖아요?"
"거기 일하시는 분들은 우리보다 상명하복이 더 심하겠죠. 교사는 그나마 학생 지도라는 역할이 있으니까 이의 제기가 가능한 거지, 그분들은 그게 없으니까 거의 불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이 공문서 만지는 일을 안 하면 아예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생활지도는 학폭이나 선도 아니면 공문에 남지도 않으니까."
성준은 일어나서 혼자 중얼거리다 연구실의 냉장고 문을 연다. 10년도 더 된 빛바랜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3월 초에 넣어둔 떡을 꺼내 봉지를 뜯고, 접시에 올려 전자레인지에 넣는다.
성준이 자리에 앉은 것을 본 지영은 다시 성준에게 묻는다.
"그럼 다른 선생님들도 저랑 비슷한 불만이 있으신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뭐 받아들여져야 말이죠. 교사 권위는 떨어지고, 그 때문에 생활지도 공백이 생기는데 그 구멍을 돈과 정책 같은 헝겊으로 누더기처럼 붙여두니까 현장에 있는 선생님은 교사 역할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도 이상한 역할만 계속하는 거예요. 애들보다 모니터만 계속 보는."
"그럼 교육청이나 교육부 분들이 문제네요?"
"그런데 이런 체계에서는 문제가 있어도 쉽게 바꿀 수가 없어요. 특히 행정 분야는 일개 한 명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더라도 체계를 전적으로 수정하고 고칠 권한도 없고, 그 필요성을 쉽게 느낄 수도 없어요. 그리고 그분들이 일부러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열심히 하는 거예요. 방향이 문제지."
"교육감님 같은 엄청 높으신 분들은요?"
"투표로 뽑히는 분이시니 좀 덜하시겠지만, 결국 표가 중요하니 학생을 교육해야한다는 목표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없어요. 게다가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결국 이런 환경.. 그러니까 교육 본연의 목표보다 행정적 업무에 능숙해야 승진이 유리한 환경에 적응하신 분들이 실제로 승진을 하고, 결국 교육감님 주변에서 일을 하게 되면 결국 교사의 자발성을 활용하기보다는 행정적 체계 중심으로 업무가 진행될거에요. 그니까 교육감이 한 명, 아니 사람이 교체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그분들도 교실에서 일하신 적이 있으실 텐데, 저희와 비슷한 고충을 알지 않으실까요?"
성준은 전자레인지에서 떡을 꺼냈다. 냉장고에 있던 차갑고 딱딱한 떡이 뜨겁고 딱딱한 떡으로 바뀌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분들이 지금 일하는 장소는 교실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교사의 수업과 생활 지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아니에요. 큰 사업을 엄청 작은 역할로 쪼개놓은 상태라 공문 보내고 예산 보내면 일단 본인 할 일은 끝나는데, 애들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해가 지날수록 지도거리는 늘어나는데, 이상하게 업무도 같이 늘어나요. 애들보다 모니터 보는 시간이 늘어나게 만드는데, 여기 반기 들고 애들 더 보겠다는 선생님은 아무래도 정책 상으로는, 업무에서 자꾸 뒤처지는 걸림돌이 되는 거죠."
"관료제의 문제점. 임용 시험 볼 때 책에서 나왔어요. 그런데 애들도 잘 보고, 업무도 잘하는 선생님도 계시더라고요. 진짜 능력자."
"능력자는 소수잖아요. 다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텐데, 지금은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되는 상황일까요?"
"아..."
지영은 커피잔을 들다 잠깐 멈췄다.
"수업 잘 듣게 해야 한다, 생활지도 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수치화하거나 정량화해서 가시적인 보고서로 나타나는 것들이 아니니까, 신경 써야 하는 항목에서 빠지는 거예요. 애초에 보고서 표현도 불가능하고, 그렇게 만드는 것 역시 지도 시간을 빼앗는 꼴이고."
"그거 큰 문제 아니에요? 막상 이런 게 잘 안 되는 애들이 학교도 잘 빠져나가고 잘 뭉쳐서 사고도 훨씬 더 크고 활발하게 치던데."
"내 말이. 교칙 안 어기고 수업만 잘 들으면 끝이 아닌데, 그 나머지를 담임 선생님들이 그냥 막연하게 각자도생 식으로 맡아서 하다 사고 나면 책임 다 져요. 그니까 다들 담임을 안 하려고 하지. 근데 아직도 예산이나 정책만 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준은 쓰레기통에 떡을 버리고 자리에 앉으며 한숨 쉬듯 말했다.
"아니, 해결이라기보다는 '내 일은 끝났다.'겠지."
7교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비가 그치지 않았다. 문을 나서자 비가 더 굵어졌다. 복도 형광등이 물기 위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현관 차양 아래에서 우산을 펼치며 성준은 잠깐 멈춰 섰다. 트랙을 따라 한 바퀴 돌아갈지, 아니면 바로 운동장을 가로지를지.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직선. 흙은 질퍽했고 신발 밑창이 진흙을 껴안았다.
쩍—쩍—.
바짓단이 물을 빨아들였다. 주차장 경계선이 가까워질수록 빗방울 소리는 굵어졌다.
차 문을 닫고 시트에 등을 붙이는 순간, 그는 습관처럼 뒤를 보았다. 운동장 위에 대각선 발자국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세 명의 학생이 따라 걸었다. 내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꼭 맞춰 포개고, 다음, 또 다음. 젖은 흙이 튀며 반달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중 한 아이가 웃으며 소리쳤다.
“야. 저 발자국 따라가 보자!”
둘이 더 웃고, 하나가 뛰어 발을 맞췄다. 빗줄기가 그 말을 조금씩 잘랐지만, 방향은 또렷했다. 내가 방금 그은 지름길을 그대로 밟아 나가는 발. 성준은 이마에 손등을 얹고, 운전석에 기대어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내가 만든 선은 생각보다 빨리, 쉽게, 멀리 번진다. 회의실에서 쌓이던 체크표, 지영과의 대화가 겹쳐 떠올랐다. 이걸 왜 교사가?이런 체계의 끝이 과연 있을까? —답을 다 갖지 못했다.
다만, 적어도 어디까지 맡고 어디서 넘길지의 경계는 우리가 그어야 하고, 그것이 역할의 생존을 결정하는 기반이 된다. 그 경계마저 누군가는 밟아 배운다. 방금처럼.
역할은 순간적인 성취에서 끝나지 않는다.
역할 수행은 시간이 지나도 흔적이 남아, 이후 세대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어진다. 교사가 학생에게 남긴 작은 격려가 평생의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부모의 역할이 자녀의 삶에 장기적인 방향을 심어주는 것처럼, 올바른 역할은 그 순간을 넘어 지속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지속되는 흔적은 역할이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삶의 일부였음을 증명한다. 시간 속에 남아 이어질 때, 역할은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
(2) Etch - 새김
역할은 말과 행동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마음에 흔적으로 새겨진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한 사람이 동료들에게 신뢰의 이미지를 남기거나, 친구가 어려운 순간에 보여준 헌신이 마음속에 오래 새겨지는 것처럼, 올바른 역할은 타인의 기억과 가치관, 체계에 흔적을 새긴다. 특히 체계의 오류에 흔적을 새기고,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함을 새긴다.
새겨지는 흔적은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타인의 마음에 각인되어 새로운 행동으로 이어진다.
(3) Affect - 영향
역할은 나 혼자만의 울타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역할은 반드시 주변 사람과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리더의 태도가 조직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고, 부모의 말 한마디가 아이의 자존감에 깊은 영향을 주듯, 올바른 역할은 타인의 선택과 행동을 변화시킨다. 영향은 역할의 힘을 증명한다. 긍정적 흔적을 남기는 역할은 다른 사람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4) Value - 가치
역할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남긴다.
선생님이 지식 전달을 넘어 삶의 태도를 가르치거나, 리더가 목표 달성뿐 아니라 조직의 문화와 정신을 세우는 것처럼, 역할은 물질적 성과를 넘어 지속될 수 있는 가치를 남긴다. 가치를 남기는 역할은 사라져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 역할의 본질은 성과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5) Endow - 부여
어떤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힘과 자원을 부여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립심을 길러주거나, 멘토가 후배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처럼, 올바른 역할은 단순히 자신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게 능력과 기회를 나누어 준다. 부여하는 역할은 자기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타인에게 힘을 나누어 줄 때, 그 흔적은 더 큰 파급력으로 확산된다.
신발은 발을 외부의 거칠음에서 보호하고, 체중과 충격을 분산해 오래 걷게 만든다. 밑창의 패턴은 지면을 그립해 미끄럼을 줄이고, 쿠션과 아치 지지는 발의 형태에 맞춰 하중을 조절한다. 오래 신으면 뒤축이 한쪽으로 닳고, 흙과 먼지가 밑창 골격에 남는다. 즉 신발은 단순히 이동을 돕는 수단이 아니라, 어디를 어떻게 걸었는지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물건이다. 속도와 방향, 멈춤과 회피의 흔적이 신발의 마모와 얼룩, 발자국으로 기록된다.
역할 수행도 신발처럼 흔적을 남긴다. 회의에서의 한 문장, 약속을 지킨 시간, 누군가를 배려해 속도를 맞춘 걸음—이 작은 선택들이 사회라는 지면에 발자국을 새긴다. 신발이 지형에 맞춰 기능을 달리하듯, 역할도 상황에 따라 그립(원칙)과 쿠션(배려)의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 미끄러운 순간엔 원칙을 더 세게 디뎌 미끄러짐을 막고, 거친 구간에선 쿠션을 늘려 동료의 피로를 흡수한다. 또한 신발의 뒤축이 한쪽으로 닳으면 자세를 교정하듯, 역할도 반복되는 마찰이 보이면 관행을 점검하고 수정해야 한다. 중요한 건 ‘발을 내딛는 당장’만이 아니다. 발자국은 시간과 관계 속에 겹겹이 쌓여 길이 되고, 그 길은 뒤따르는 사람들의 속도와 방향에 영향을 준다.
신발은 닳아 사라져도 발자국은 한동안 남아 길을 안내한다. 역할도 마찬가지다. 한 번의 친절, 한 번의 책임, 한 번의 공정한 판단이 곧 사라지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흔적은 주변 사람에게 가능한 경로를 보여 준다. 그래서 좋은 역할 수행은 현재를 통과하는 기술을 넘어, 미래로 이어질 발자국을 의식하는 태도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 누군가의 표준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걷는 법을 조심스레 고르고, 마모를 점검하며, 필요하면 끈을 다시 묶는다. 그때 역할은 ‘지금의 편안함’이 아니라 길을 남기는 책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