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쫓은 건 허상이었다.

글쓰기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

by 백수광부

15, 16, 17화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비 올케, K녀를 만나기로 한 날은 4월 4일 저녁이었다. 우리는 경기도 내 중식당에서 모이기로 했다. 울엄마가 생신을 3주나 당겨서 행차하셨다. 그 정도로 예비 며느리를 빨리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알 수는 없지만 벚꽃비 내리는 날이 우리의 첫 만남이 될 예정이었다.

4월 3일에 오 남매 단톡방은 활기 넘쳤다. 마지막 인원 체크로 분주했다. 사전에 여행과 모임 계획인 사람을 빼고도 10명이 모일 예정이었다. 어떤 코스 요리를 얼마나 시킬지 대화가 오갔다.


막내가 말했다.

“K녀는 여자 3인분이야.”

우와. 잘 먹네. 이제 너희 집은 5인 가구야? ㅋㅋㅋ”

‘음, 셋째한테 듣던 대로군.’


"H서방 vs K녀 먹방 배틀 보는 거야? 이거 흥미진진한데?"

웃는 이모티콘이 단톡방을 훈훈하게 했다.


디진다 돈까스도 도전한단다.”

막내 입에서 비속어가 나오다니, 최소한 누나들 앞에서는 그런 말을 안 하던 아이였는데, 데이트 식대가 얼마나 부담되었으면 '디진다(뒤진다,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인가 싶었다.

넷째가 막내의 말을 급하게 맞받아쳤다.


“-_- 내려가는 휴게소마다 서겠구나. 위장 청소하냐.”

이런 말장난이 우리 오 남매 스타일이다.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돈까스에 꼭 도전을 해야 한대? 많이 먹기 도전이야? 들어가는 게 도전인 돈까스 맛집이야?”

넷째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아, 근처에 엄청 매운 돈까스 맛집이 있어.”

“K녀는 매운 거 잘 먹나 보네.”

디진다 돈까스라고 유명한 곳인데, 맵질이는 보기만 해도 어휴~”


“돈까스집 이름이 '디진다'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출처 : 매운 돈까스 생김새


진짜 디질 지경이었다.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후 얼마나 웃었나 모른다. 휴게소마다 서겠구나라고 한 넷째 말도 이해되었다. 매운 음식 먹고 장트러블 생기면 휴게소마다 들러야 한다.

경기도 맛집 방문 계획까지 철저히 짜둔 3인분을 맛있게 먹는 경상도 K녀가 더욱 궁금해졌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이런 쎄한 느낌!

목이 칼칼했다.

이 중요한 날, 안 돼!

혹시나 싶어 딸아이 방으로 갔다. 열이 끓었다. 옆자리 친구가 독감 걸려 결석했다더니 불길했다. 딸을 데리고 급히 병원으로 갔다. 예상대로였다. 아이는 주사와 수액을 맞았고, 나도 선제치료 차원에서 주사를 맞았다. 집으로 돌아와 약을 먹이고 아이를 재웠다.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가긴 가야 했다. 멀리서 엄마가 올라오셨고, K녀도 봐야 했다. 글(글감 사수)도 써야했다.

저녁 즈음 마스크를 끼고 출발했다. 질병투혼이었다. 드레스 코드는 검사 컨셉이었다. 오버핏 재킷을 입고 K녀를 심층 취재(취조)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예약된 룸을 안내받고 문을 여는 순간 예비 올케 K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여우였다.

하지만, 증명사진과는 다른 여우였다.

보기 좋은 후덕한 여우였다.

그냥 합격이다. ^^

시누이들은 그녀에게 안 될 것 같았다. 여러모로 깽갱할 것 같았다. 애교도 안 되고, 섭취량도 안 될 것 같았다. 질문 한 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왔다.


원효대사 해골물 깨달음처럼 내게도 깨달음이 왔다. 머릿속에 띵하고 치고 갔다.


'증명사진 하나로 내가 소설을 썼구나. 어리석었구나. 증명사진이 허상인 걸 알면서도 믿었구나.'


K녀와 대화를 제대로 해보지 못해 여전히 그녀는 미지의 세계다. 하지만, 호기심과 궁금증은 사라졌다. 내 눈 앞에 있는 K녀는 그저 동생이 좋아하고 결혼하려는 여자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해골물이 맛있다고 먹으면 그게 꿀맛이지.


혹시 나는 K녀를 소설 속 캐릭터로 굴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와 13년 차이나는 K녀와의 공통 화제를 찾지 못한 채 나는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과 대화하기 바빴다.

“식구가 많아서 시끄럽죠?”

K녀에게 던진 말인데 막내가 답변을 낚아챘다.


“오늘 K녀 달팽이관 흔들린다.”


K녀의 귀를 보호하기 위해 둘은 데이트 하라고 내보냈다. 혼자일 것만 같던 남동생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만지는 K녀를 보니 훈훈하고 보기 좋았다.


꼬리 아홉 구미호도,

명랑한 여우도 아닌 후덕한 여우, K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낸다.

5th 액자(막내 결혼 액자)가 울엄마 수료증 자리에 걸리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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