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10. 악령 /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한 생계형 작가였다. 원고료를 받아 먹고살기 위해 펜을 들었다. 골방에 은둔해 상상력으로 글을 쓰는건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사회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그래서 도박, 사치, 음주, 살인, 가난, 정치, 종교 등의 소재들이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한다.
'악령'을 읽은 사람이라면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한마디가 있을 것이다. 바로 '행적적 희열'이다.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소설 속 인물 스테판도 마찬가지였다.
"행정적인 희열이라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군요."
"그건 말이죠.. 거지발싸개 같은 기차 승차권 매표소 일을 누구든 가장 비천한 사람에게 맡겨 보세요. 그러면 이 하찮은 사람은 당신이 표를 사려고 오면 자기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마치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것처럼 당신을 무시할 겁니다. '이봐, 당신에게 내 권력을 보여 주겠어. 이게 바로 그거야'라는 식으로요. 이 상황이 되면 그 사람은 행정적 희열을 맛보는 겁니다."
'악령'의 주요 인물인 스테판 베르호벤스키는 자신이 받은 부당한 처사에 대해 현 지사를 찾아가 항의한다. 지사는 스테판의 억울함에 대해 귀 기울이기는커녕 "내가 누구인지 알고나 감히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라고 호통을 친다.
스테판은 자신의 후견인이자 친구인 바르바라를 찾아가 관료들의 그런 행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데, 이떄 바르바라가 해 준 말이 바로 '행정적 희열'이다. 간이역 매표소 직원도 자신 앞에서 쩔쩔매는 승객을 보며 행정적 희열을 느끼듯이,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건 모든 인간의 본성이라고 도스토옙스키는 바르바라의 입을 빌려 말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권력을 쥔 자들의 부당한 '갑질' 행태를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다. 갈수록 사회적 불균형이 심해지면서 고위 관료들의 권력 남용은 다방면에서 사회적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빚어 낸 이러한 사회적 고질병에 대해 150년 전의 도스토옙스키는 '행정적 희열' 이라는 한마디로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다른 책 '죄와 벌'에서도 그려진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경찰서 출두 통보를 받고 바짝 긴장해서 경찰서로 달려간다. 경찰서에서 만난 첫 번째 공무원은 자기 업무가 안라며 손가락으로 다른 곳을 가리킨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대면한 고위 경찰은 9시까지 출두하라고 통보했는데 왜 12시를 넘겨서 왔느냐고 호통을 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환장을 15분전에야 받았다고 억울함을 토로하지만, 경찰은 담배를 피우면서 '여기가 어딘데 건방지게' 식으로 상대를 업신여긴다. 행정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시민을 탓하고 권위적으로 나오는 고위 공무원의 흔한 모습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행정적 희열을 탐하는 관료들의 행태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소설 곳곳에 담아냈다. 사실 도스토옙스키 자신 역시 행정적 희열의 희생자였다. 그는 젊은 시절 농노 해방 같은 '불순한 모의'를 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 일에는 기껏해야 몇 개월간의 유배형을 받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도스토옙스키는 총살형을 선고 받았다. 그렇게 그가 두건을 쓰고 사행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황제의 칙사가 나타나 사형을 취소하고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알고 보니 이것은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쇼였다. 애초부터 황제는 철없는 젊은이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고 처형쇼를 통해 단지 겁만 주려 했다. 그 당시 황제는 이런 쇼를 종종 즐겼는데,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사형 연극이야말로 인간 목숨을 두고 장난을 치는 행정적 희열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