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DNA 거슬러 올라가기
나는 대학생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평생을 일만 하다 희귀병으로 인해 눈이 안 좋아지기 전까진 제대로 놀아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쉬는 주말도 혹여 일이 끊길까 불안해 업장에 출근하고, 집에 돌아와 잔업을 수행하면서 내 나이의 두배도 넘게 살아왔다. 아니, 견뎌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이렇게 ‘현실’ 안에 갇혀버린 세계 안에서 ‘취향’이란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기껏 어딜 데려가도 "이건 얼마냐", "맛대가리도 없네", "비싸다", "집가서 밥 먹지, 뭐 하러 이런 데를 오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처음엔 서운했다. 같이 예쁜 곳 가고 싶어서, 새로운 경험 만들어주고 싶어서 데려간 건데… 매번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았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더 비싸고 맛대가리 없는 데로 데려가 보자. 그래서 갔던 곳이 경복궁 생과방이었다. 티켓팅까지 해서 갔는데, 할머니 첫마디가 "드럽게 쪼끔 나오네." "언제 집 가냐." "양이 너무 쩍다." 였다. 그때 좀 웃겼다. 티끌만 한 개성주악을 보면서 혀를 차던 할머니 모습이. 솔직히 맛은 있었던 거지. 그걸로도 됐다 싶었는데 다음 날 할머니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있었다. 생과방을 나오며 “두분 사진 찍어드릴게요.” 하는 직원 분의 말에 따라 억지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요즘 애들처럼 귀족 영애 놀이 시켜주고 싶어서 데려간 애프터눈 티 세트 집에서도 똑같았다. 홍차를 한번 마시더니 “퉷…” 온갖 디저트를 보면서 “이깟 빵쪼가리 먹으려 여기까지 온 거냐." 마카롱을 한 입 깨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달아서 혀가 아린다 아려.” 하는 순간, 솔직히 나도 동감했다. 아 이건 실패다 싶었지만 이젠 그냥 웃음이 났다. 실패만 수십번. 뭘 해도 불평 불만이니 이쯤에서 나의 오기는 독기라 봐도 무방했다.
가운데 바리스타가 유니폼을 입고 드립 커피를 내리는, 곳곳에 빈티지 소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재즈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좋은 카페로도 데려가봤다. "이런 데는 너같이 젊은 애들이나 오는 데 아니냐?” 하면서도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이 좀 좋아 보이긴 했다. 뭔가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속에 있는 사람처럼… 딱히 좋다고 말은 안 하는데, 그런 건 은근히 티가 나는 법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 말이 쿡쿡 박혔다. 왠지 “나같은 사람이 이런 곳에 와도 될까?” 하는 말처럼 들려서 조금 짠했다. 어딘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온 영화 속 아이들처럼 두리번 거리다가 자신의 존재가 민폐가 아닌지 눈치보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할머니의 ‘싫다’는 ‘누군가가 나를 싫어할 까봐 두렵다.’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누군가 나를 주책이라 욕하진 않을까, 내 존재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여태까지 빨간 선을 잔뜩 그어두었던 할머니의 지도. 나는 그걸 박박 빨아서 다시 새거로 돌려주고 싶었다.
광화문 인근의 사람 없는 인디 영화관들에도 데려갔는데, 그때는 정말… 최악이었다. 맨날 졸아서 코골려고 하면 내가 팔 꼬집어서 깨웠다. 영화에 집중하긴 커녕 할머니 감시하려고 온갖 신경이 집중되어있었다. “나는 왜 사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할머니의 주된 멘트였다. 혼자 오면 근처 카페에서 시집도 읽고, 분위기도 즐기고, 우아하게 차도 마시고 그러는데. 괜히 이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다 포기하는 게 맞나 싶다가도… 또 끌고 가고 싶고, 보여주고 싶었다. 나에게 당연한 이런 세계를. 어쩌면 할머니가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를…
어느 날 우리는 에무시네마에서 <라이스보이 슬립스>라는 영화를 관람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할머니가 엄청 지루해할 것 같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로 가자 옆에서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더라.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 이민자가 산 정상에 올라 목청 높여 소리지르는 장면이었다. 아, 생각해보니까 할머니는 한번도 어디서든, 누구 앞이든 소리쳐본 적이 없없다. 어떤 일에도 무던하고 시크한 건 할머니의 타고난 기질인 줄 알았는데, 실은 참는 것이 익숙해서 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으면서 내가 '좋았지? 좋았지?' 하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니까, "응…" 이러고 얼버무리는데, 그게 왜 그렇게 귀여웠는지 모르겠다. 평소처럼 뭐라뭐라 안 하고. 그날 따라 표정이 좀 말랑했다. 가로등 조명과 선선한 날씨가 어우러져 그날을 떠올리면 몽글몽글한 기운이 감돈다.
얼마 전엔 (쉬림프 감바스 알리오 올리오를 빙자한) 혼돈의 파스타를 해줬는데, 할머니는 내가 처음 요리하는 꼴을 보더니 “마늘을 왜 이렇게 많이 넣어.” “기름을 아주 콸콸 붓네 부어. 이거 다 어쩔거야.” 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가만히 앉아있으라니까 걱정 됐는지 옆에 졸졸 따라다니면서. 내가 “할머니가 뭘 알아? 이거 먹어봤어?”했는데 TV에서 봤다고 했다. 그게 괜시리 슬펐다. (아니, 내가 파스타집 데려간 게 몇번인데? 글쓰는 지금은 반박하게 되지만) 아, 이 사람은 이런 걸 경험해볼 기회조차 없었구나. 취향이란 게, 애초에 필요 없었을 수도 있는 인생이었구나. 리터럴하게 의식주. 먹고사는 문제 말고는 중요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평생 돈을 모으기만 했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 그냥 미래가 불안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통장에 저축만 한 거다. 할머니 이름으로 된 부동산도 하나 있는데, 망한 NC백화점 코너 일부라 매해 세금만 내고 있다. 명색은 임대 사업간데 들어오는 돈은 없고, 헤택도 못 받고 이런 애물단지 팔아버리지도 못하고,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비합리적인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 사람들을 못 믿으면서도 사람 때문에 망하고, 보증 서주다 날리고… 우리 할머니는 그러면서도 혼자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두 딸을 길러내고, 이젠 다 큰 손주 밥 해주면서.
이따위 별 쓸데 없는 짓을 5년 이상 지속하니 할머니가 좀 변했단 걸 느낄 때도 있었다. 호주 살던 이모네 가족들이 오자 자기가 먼저 나서서 어디어디 카페 가자고 하는데 좀 귀여웠다. 예전 같으면 "그딴 데 왜 가냐. 집에서 믹스 커피나 타마시자.” 했을 할머니가. 예전에 함께 본 뮤지컬이나 콘서트 얘기를 친구들한테 자랑도 한다. 카페 추천도 해준다. ‘나도 그런 데 가봤다’는 자부심 같은 게 생긴 모양이다.
할머니는 싫은 건 참 금방 말하는 사람이다. 근데 좋은 건 잘 못 말한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하면 누가 뺏어가는 마냥. 감추고 꼭꼭 숨기고 싶어한다. 그걸 최근에서야 조금 알게 됐다. 말로하지 않으면 다 휘발되어버리는데 누가 그렇게 가르쳐주기라도 한 걸까. 살아온 인생이 그리 일러준 걸까. 하지만 다 맛없다 하던 그 입에서, 가끔은 "그때 갔던 거기 괜찮더라, 다음에 너네 가족 데려가자.” 같은 말이 불쑥 나오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취향에 집착할까. 왜 이토록 좋고 싫은 걸 뾰족하게 알고 싶어질까. 이미 있는 취향마저 왜 더 예리하게 갈고 닦고 싶은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마도… 할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처럼은 안 될 거야’ 이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서 이어진다. 그런데 이건, 나만의 마음이 아닐 거다. “엄마처럼은 안 살 거야.” 이 문장은 우리 모두의 문장이니까. 어쩌면 나의 설움과 한이,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엄마의 한이었고, 그보다 더 올라가면 이 시대와 저 시대 여자들의 한, 결국 인간의 한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할머니들 세대는 그랬지. 전쟁통 지나고,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공장에 나가고,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취향 따윈 사치였던 시대. 그래서 ‘이게 좋다’고 말하는 법도, 그걸 배울 틈도, 여유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 그런 삶이 뼈에 새겨져서, 나중엔 좋은 걸 봐도 ‘좋다’고 말하는 방법조차 잃어버린 사람들. 나는 그게 가슴 아프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랑 가는 어디든, 뭐든 다 기록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더 자유로워진 할머니를 보면서 다른 할머니들도 언젠가는 가슴에 찬 족쇄를 훌렁훌렁 풀어제끼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 나이에 이제 와서 뭘 해.” 자신의 인생이 다 끝난듯, 죽을 날을 받아둔 사람처럼 말하는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어릴 적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공부해보고 싶었다고, 미술도 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솔직히 지금도 할 수 있잖아? 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당연한 그 말이 할머니에겐 절대적인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어쩌면 박막례 할머니를 보면서, 윤여정 할머니를 보면서 인생의 전성기를 계속 갱신하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우리 할머니에게도 다시 꿈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는다. 우리 할머니도 언젠가 다른 할머니의 희망이 되는 날도 올까, 그런 희망도 품는다. 그래서 할머니가 싫다 싫다 해도 나는 또 가고 싶다. 어디든. 할머니가 좋아하는 걸 말로 하지 않아도 내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할머니가 좋다 좋다 계속 말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