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재님 되시죠? 앞에 잠깐 앉아 기다리세요.”
병원이라기보다 동네 PC방이 더 어울릴 법한 차림의 남자가 문틈 사이로 말했다. 흰 가운은커녕, 사무용 의자에 반쯤 돌아앉아 느슨하게 기대고 있었다.
그는 의료 영상 자료를 보면서도 옆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절뚝이는 걸음, 간헐적 비명과 한숨이 흘러나오는 복도 속에서, 그 웃음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현실을 모욕하듯 가볍고 유쾌한 웃음.
나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웠다. 금세 일어나, 나도 모르게 이상한 스트레칭을 반복했다. 무엇에 대비하는지도 모른 채.
두 번째 세트를 시작하려던 순간,
“홍석재님, 들어오세요.”
그가 내 리듬을 깨뜨렸다. 아직 덜 끝났는데…
진료실 문을 열고 좌측으로 들어서자, 다행히 이번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백발의 남자가 나를 맞이했다. 안도의 숨을 들이쉬기도 전에 그는 말없이 커다란 기계를 가리켰다.
거대한 흰색 기계, MRI였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또래가 실제로 마주할 일은 드물다. 마치 누구나 아는 UFO처럼, 의학 드라마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
그 기계를 보는 순간 묘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그 안에 들어가면 내 모든 비밀이 들통나는 건 아닐까.
침대에 누워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허리와 다리는 절대 움직이면 안 되고, 중간에 멈추고 싶으면 손에 쥔 스위치를 세 번 누르라고 했다. 촬영 시간은 약 15분. 소음이 크다며 군대 사격장에서 쓰던 것 같은 귀마개를 건네주었다.
기계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병실 벽에 붙은 풍경 사진처럼, 거짓된 평온 아래, 고립감은 더 선명해졌다.
천천히 기계 안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큼직한 로고가 들어왔다. PHILIPS. 무의식은 현실을 견디지 못할 때, 엉뚱한 곳으로 도망친다. 내 머리는 필립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기업, 반도체 부문은 팔았고 지금은 의료기기와 조명으로 유명하다. TV도 만들었었다. 내 신경은 피하고 싶은 감정을 피해 쓸모없지만 안전한 기억 속으로 숨어들었다.
기계는 더 깊숙이, 일정한 소음을 내며 돌아갔다. 불안을 덮으려던 찰나, 기계가 말을 걸었다.
“이번 검사는 3분 동안 진행되겠습니다.”
피이잉. 슈욱, 슈욱, 슈욱… 익숙하지만 무표정한 여성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MRI는 금속과 충돌하면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스쳤다. 인공와우나 금속 삽입물을 반드시 확인하는 이유. 그러고 보니 내 어금니 금니는 괜찮을까? 금값이 비싼 이유를 되새길 틈도 없이 기계가 다시 움직였다.
침대가 아래로 미끄러졌지만 나는 미동도 할 수 없었다. “이동 중에도 움직이지 마십시오.” 차가운 기계음이 반복됐다.
숨이 어째서인지 잘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해서일까, 폐쇄공포증일까, 긴장해서일까. 크게 숨을 쉬면 횡격막이 움직여서 괜찮을까. 하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아 자꾸 심호흡을 반복했다.
눈을 감는 건 선택이 아니었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으니까. 나는 상상이라는 마지막 도피처로 달아났다.
쿵쿵, 쿵쿵. 창문 너머에는 이국의 풍경이 펼쳐진다. 겹겹이 겹친 산맥은 푸르게 숨 쉬고, 끝없이 이어진 들판엔 가축들이 태평하게 풀을 뜯고 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이름 모를 꽃들이 햇살을 머금고 피어 있고, 은빛 강물은 천천히 흐른다.
시야를 창에서 안으로 돌리면, 여행의 설렘으로 빛나는 승객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웃고 있다.
마주 본 좌석엔 낯선 이국의 그녀가 앉아 있다. 햇살에 빛나는 붉은 머리칼, 결 고운 눈썹, 귀까지 걸린 활짝 웃는 입꼬리. 나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는다. 시선을 마주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한국 사람이세요?"
자신이 BTS 팬이라며, 어설픈 한국어로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소타라고 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S자를 그리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행이란 늘 무모한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잊고 있었다.
농담을 주고받던 중 그녀는 자신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게 유튜브각일까, 아니면 비포 선라이즈일까. 나는 여행의 목적지도 잊은 채 머뭇거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렇게 웃는 소타를 보고 있자니, 선악과의 실수를 반복하게 되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와 기차를 이어주는 철문에서, 신발을 대충 꺾어 신은 사내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 없이 사람들을 툭툭 치며 표를 검사하고 있었다. 열차 안의 따뜻한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분위기를 깨뜨리러 온 사람 같았다. 덥수룩한 수염에 지친 얼굴, 눈빛엔 누구 하나 걸리길 바라는 짜증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에게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속으로 되뇌었다. 저 사람이 영어는 할 수 있을까? 내가 소타의 집이 있는 정류장에서 내리겠다고 하면 뭐라고 할까? 소타가 설명해 주겠지?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거의 다가왔다. 그의 지나간 자리에는, 방금 전까지 사진을 찍고 웃던 사람들의 손에서 핸드폰이 내려가 있었다. 모두는 가방을 정리하고 흩어진 짐을 주워 담으며, 하나같이 눈을 치켜뜬 채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내 자리 앞으로 왔다. 나는 죄를 지은 것도 없고, 규정에 어긋나는 물건을 소지한 것도 없다. 나는 당당했고, 친구 소타가 나를 도와줄 거라 믿었다. 그는 내 허벅지를 가볍게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홍석재님, 검사 끝났어요. 앞에 잠깐 앉아 기다리세요.”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느슨한 자세로 사무용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기계도, 여행도, 소타도, 모두 기계 밖에 두고 나온 듯이. 나는 그제서야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