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쉴 만큼은

운이 좋았다

by 아보카도

맞았지만 병원에 실려 갈 만큼은 아니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으며

마틸다를 보며

나는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나와 인사하곤 했다.


엄마는 늘 내 머리채부터 잡거나

손톱으로 나중에 흉이 지는 상처가 날 때까지 할퀴거나 말대꾸를 시작하면 뺨을 때렸다.

아버지는 청소년이 되어 고분고분 맞고만 있지 않는 나와 엄마가 다투면 엄마의 전화를 받고 어디선가 달려와, 내게는 묻지도 않은 채 보이지 않는 곳을 때렸다. 엉덩이 바로 밑 허벅지라던가.

등짝이라던가. 또다시 뺨이라던가. 그러고는

마치 흑기사 역할을 했다는 듯이 해결했다는 얼굴로 돌아 나갔다.


둘 다 겨울에는 나를 마음 놓고 때렸다.

옷으로 가릴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부모는 늘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면서도

어떤 순간만큼은 지나치리만치 합심하는 때가 있었는데, 자식 중에서도 나를 때려(잡는) 날이 유일하게 그날이라는 사실이 불편했다.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화가 나게, 그날은 뭔가 그들이 '내가 아닌 곳에서 온' 스트레스를 '나'라는 분출구를 통해 풀어내는 느낌이었다. (오락실 샌드백을 내리쳐 점수 많이 받은 애들 같았다)


언젠가 엄마가 낮에 분이 덜 풀렸는지(말싸움에서 밀렸던 것 같다. 내가 말문이 막히게 반항하는 데 도가 텄을 무렵이다) 밤에 문을 열고 들어와 발 뒤꿈치로 내 복부를 가격하는 날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생활했다. 걸어 잠가야, 그제야 안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 때문에 악순환도 이어졌다. 아버지는 방문 고리를 부수고 들어와 때리기도 했다. 그래도 문고리를 다시 달아놓고는 했는데, 그건 남 눈을 의식해서였거나, 그 집이 전셋집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산 집은 정말 문고리를 부쉈고 문에도 공구를 내리쳐 구멍을 뚫어놨다)


그들은 한 번 어떤 고삐가 풀려 눈빛이 돌기 시작하면 특히 아버지는 나를 거의 다리몽둥이가 부서지도록 붙들어놓고 때렸다. '잘못했다고 빌기 전까지 계속 맞을 줄 알아'라거나, '너 같은 애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몸에 힘을 빼고 동공 힘이 풀어지면 그제야 멈췄다.


학교 생활이 온전할 리 만무했다. 학교 안 가는 일요일을 제외하더라도 한 주 6일 중 2-3일은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다. 큰소리가 안 나면 얼마나 불안한지 먼저 내가 큰소리로 엄마한테 시비를 거는 날도 많아졌다. 나는 맞아 죽어도 잘못하지 않은 일로 잘못했다는 말을 못 했다. (그래서 더 맞았다) 맞는 말로 따지기를 반복했다.(순풍산부인과 미달이 같은 애였다) 이해되지 않는 일에 끄덕이지 않는 자식은 미숙한 부모를 크게 자극했다.


풀리지 않는 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던 청소년 시기에서 나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모를 이해하려고 그들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를 천만 번쯤은 반복했던 것 같다. 고민하면서도 도와주고 싶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안타까운 눈길로 '그냥 잘못했다고 말해'를 제안하고는 제 갈길을 가거나, 대부분은 '알아서 거리를 뒀다'. 엄마를 또는 아버지를 말리려다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임을 느끼고서는 애써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울고 불며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몸만 다 큰 청소년을 두고 엄마는 '쟤가 정신이 좀 이상해요'라고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고, 아님을 증명하는 수십 년을 지냈더니 '내가 언제 그랬냐 없는 소릴 지어서 한다'라고 잡아뗐다.


맙소사, 엄마는 나르시시스트였고 아버지는 '행복한 이기주의자'책의 겉표지를 들먹이며 합리화를 시전 하는 진짜 이기주의자였다.(이 베스트셀러 저자 분 죄송해요. 저희 아버지가 좀 많이 그렇습니다)


생존 자체에 너무 힘을 쓰느라 어떻게 어느 지점까지 왔는지도 모르게 그 시간을 지나왔다. 집을 나가야겠다고, 도저히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마음먹은 14살부터 꼭 10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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