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바지, 빨간 신호등, 텅 빈 도로

by 노일영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니 아침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른 아침이었을 수도 있고 느즈막한 오전이었을 수도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날이 밝아있었고 도로에 차가 별로 없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아마 이른 아침이었던 것 같다. 평일이었을까 주말이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아들, 아들, 아들' 엄마가 애타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엄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방 문 옆 벽을 짚고 곧 쓰러질 듯이 겨우 서서 날 부르고 있었다. 방에서 나온 나를 보자 엄마는 '아들 엄마 이상해'라는 말과 함께 주저앉아 버렸다. 급하게 옷을 주워 입고 엄마를 업었나 부축했나 잘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차에 태우고 차에 비상 깜빡이를 켜고 신호를 무시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쓰러지는 엄마를 겨우 붙잡아 소파에 앉히고 옷을 입으면서 생각했다. 옷을 입어야 하나. 입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옷을 입는 몇 초에 엄마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옷을 안 입고 나가면 그게 더 큰 일은 아닐까. 급하게 잠옷 바지를 입었던 것은 기억나는데 그 위에 뭘 입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었는지 그 순간의 사고가 여전히 떠오른다. 그게 왜 계속 생각나는 걸까. 그게 뭐라고. 모르겠다. 도로에 켜있던 빨간 신호등, 텅 빈 도로, 이런 것들과 병원에 간 것까지는 생생히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 뭐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엄마는 두 번의 큰 수술을 해야 했다. 까맣게 죽어버린 왼쪽과 오른쪽의 전두엽 주변으로 다른 뇌혈관을 옮겨 심어 미세 혈관이 자라게 하는 수술이었던 것 같다. 뭐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충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한쪽은 고려대학병원에서, 다른 한쪽은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했는데 다행히 두 번의 수술 모두 성공적이었다. 가끔 한 번씩 CT를 찍어볼 때마다 의사 선생님들이 심어둔 혈관은 여전히 튼튼하게 잘 보인다. 처음 쓰러지기 전보다 몸에 살이 조금 붙기는 했지만 그건 나이 탓이기도 하고, 그 나이 즈음이면 흔한 당뇨나 관절 문제도 없다. 왼쪽 반신이 미세하게 불편하지만, 유심히 관찰해야 눈에 뜨일 정도이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충분히 건강하다. 올 3월에 다시 뇌출혈이 일어나기 전까지 십 년이 넘도록 큰 문제는 없었다.


엄마가 꽤나 건강하다는 건 좋은 일이기도 하고 좋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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