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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앗티즌 Apr 15. 2022

우리는 거절당했다

문화예술교육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우리를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 어디에서나 그런 일은 다반사일 것이다. 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것이 교육이라는 범주에 있지만, 평가를 받고 점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예술적 기능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언제일지 모르는 학습자의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 아니면 학습자의 만족도 조사로 교육 효과를 입증해야 한다. 학습자의 문화예술교육 경험은 아주 먼 훗날 발현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런 교육을 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실래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참 어렵다. 이것도 점점 노하우가 쌓이면 잘 포장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오겠지하는 작은 희망을 품어 본다. 


우리는 처음에 기획했던 6호 처분 시설에서 함께하는 것을 거절당했다. 

이유는 코로나 19로 인한 시설에 외부인 출입 금지된다는 것이다. 시설 선생님들도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서 인터뷰도 거절하셨다. 이해된다. 우리도 코로나는 무섭다. 특히 이런 시설에서의 전염은 정말 큰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우리 프로젝트가 매력이 없는 것인가? 관계가 소홀했던 것인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것인가? 


이해하지만 서운했듯이, 서운하지만 어쩌면 다행이라는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기획서를 가지고 평가를 받는 당시에도 선발이 되어 사전 워크숍을 하는 중에서도 우리의 참여대상에 대한 걱정을 많이 들었다. 특수대상을 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있는가? 참여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사업을 위해 이용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교수자와 학습자의 형태가 아닌, 예술 프로젝트의 기획에도 함께하면서 우리는 가이드 역할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여기서도 갸우뚱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포기한 것이 아닌 거절로 인해서(그것도 팬데믹에 의해서) 못하게 되었음이, 대체할 수 있는 6호 처분시설을 찾을 수 없음이 살짝 다행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상을 넓히다

우리는 그래도 처음 기획한 6호 처분시설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년에 코로나가 종식된다면 다시 시도해 보자. 그동안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다시 프로젝트를 제안해보자. 그러려면 완전히 다른 대상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6호 처분시설을 포함하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 대상을 확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확장은 우리가 생각한 그 이상이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분명 존재했다. 학습에 부적응했거나, 교우관계가 좋지 못하거나, 가정형편이 좋지 못한다거나, 범죄에 노출되었거나 뭐 그런 이유로 학교에서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나온 친구들을 학교 밖 청소년이라 생각했고, 최근의 뉴스에서 학교 밖 청소년의 코로나 지원금에 대한 뉴스를 방송하면서도 비행을 저지르는듯한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송출했다. 하지만 학교 밖 청소년에는 정말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과 생각으로 학교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 학교의 울타리 밖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무엇인가 결핍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였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온전한 나”이기 위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친구들이었다. 


실제로 학교 밖 청소년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는 초등학교ᆞ중학교 또는 이와 동인 한 과정을 교육하는 학교에 입학한 후 3개월 이상 결석하거나 취학의무를 유예한 청소년 또는 고등학교 또는 이와 동일한 과정을 교육하는 학교에서 재적ᆞ퇴학처분을 받거나 자퇴한 청소년, 또는 고등학교 또는 이와 동일한 과정을 교육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청소년. 이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청소년을 말한다. 그리고 2020년 4월 1일 기준으로 52,261명의 초등학교ᆞ중학교ᆞ고등학교 학생이 학업을 중단하고 있는 것으로 나왔고, 학급별 학업 중단 사유는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도 기존에 우리가 생각했던 학교 밖 청소년인 비행형은 6.0%이고 학업형과 직업형이 50.4%와 32.4%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왜 학업을 이유로 학교 밖으로 나오는 것일까? 




이미 학교는 붕괴되었다


우리는 점점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말이 불편해졌다. 

학교 안과 밖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 과연 학교에 다니고 있는 청소년들은 학교라는 제도에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정말 같은 예는 아니지만,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은 그들이 보호받고 있는 안락함을 느낄 것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청소년 시절 듣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가 떠올랐다. 그때는 다소 과격하게 느껴질 던 가사가 이제는 또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중략>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며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2020년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서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모든 수업은 온라인으로 대체되었고, 여기저기에서 교육 공백이 드러났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것에 가장 큰 문제는 어린 어린이들의 보육의 문제와 급식의 부재였다. 학습 공백 또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모든 아이들이 하향 평준화되는 것이 아니라 M자 형태의 양극화로 나타났고, 그것은 상위권 아이들은 오히려 더 성적이 향상되었다. 학교 교육의 부재가 어떤 청소년에게는 성적 향상의 기회가 되었다. 학교란 곳이 대학을 가기 위한 포장센터라면 그 기능은 매우 약화 되었다. 포장을 더 잘하는 센터가 즐비하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학교 선생님이 수업이 별로라면서 자퇴를 하고 학원에 다녀 아주 좋은 학교에 진학한 친구가 여럿 있다.


최근에 찾아본 글에서 학생들에게 ‘학교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했을 때, 학생들은 자기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배움터에서부터 지옥까지 다양하게 이야기했다. 잠을 보충하고 친구를 사귀는 곳, 놀이터이며 꿈을 키우는 장소 등등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매우 안타깝게도 전반적인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보다 부정에 가까웠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본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의 제주도 편에서는 천진난만한 5학년 삼총사를 길에서 만나 학교에 머물고 싶은 시간을 물었다. 그러자 한 학생은 10시부터 3시까지 학교에 있고 싶다. 다른 학생 한 명은 3분, 나머지 한 명은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왜 학생들에게 학교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인가.


그러면 학교는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과 같은 학교 시스템은 2차 산업시대의 산물이다. 그전에는 모든 국민을 국가가 교육하지 않았다. 소수의 귀족만 교육의 특혜를 받았다.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고 도시가 발달하게 되어 비로소 학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사실 산업 사회의 ‘숙련된 노동자’를 키워낼 필요가 있었고, 나의 교원자격증에는 교육부가 아닌 ‘교육인적자원부’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이 이름이 산업주의의 교육관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 아닌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학교의 시스템을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되어 있다. 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정확한 시간에 맞게 공부하 고, 같은 시간에 하교하는 연습으로 성실한 노동자로 키워내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있는 동안 부모는 직장에서 일할수 있으니, 이 또한 노동자를 위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획일화된 교육이라고 비판 받는교육은 일부 귀족만 받던 교육의 수혜를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평등의 의미에서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있고, 성공의 기회를 공평하게 얻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많이 변했고, 이제는 3차도 아닌 4차 산업 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그러니 2차 산업혁명 시대에 머물러 있는 학교 시스템은 학교 붕괴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어때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시대에 맞는 이상적인 학교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하여 여러 가지 조사를 시작했다. 꽤 지난 글이지만 미래학교의 모델을 벨기에의 ‘학습 및 재설계를 위한 연구실’을 소개하면서 ‘학습공원’이나 ‘학습마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연령과 관계없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서로로부터’ 배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무학년제뿐 만 아니라 교사는 역할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팀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씨앗티즌이 지향하고 있는 것과 아주 흡사했다. 교수자와 학습자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로부터 배우고, 이들은 팀원으로 받아들여 프로젝트 메이트로 함께하는 교육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그렇다면 이런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학교라는 제도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씨앗 티즌이 만들 어가는 문화예술교육에서 교육 모델과 학교와의 관계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지만 적어도 이것은 명 확해졌다.



우리가 학교 안과 밖으로 구분하여 규정하는 사회적 시선을 따를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가 교육 대상을 학교 밖 청소년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개인 적 경험에서 비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꽤 긴 시간 동안 예술의 테두리 내에서 작업하기도, 기획하기도 하면서 느낀 건 예술을 향유하는 기회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는 지역, 문화적 환경, 학력, 나이, 경제 수준 등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상당히 불평등하고 차등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1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질적인 부분이야 어떻든 양적으로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을 보면서 어디에 살든 어떤 문화적 환경을 가졌든 예술 향유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여야 하고, 그것을 향유하든 아니든 그것은 개인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의 상태, 존재하되 존재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 있으면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다. 심지어 경험할 수 없었구나,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상태가 존재한다. 이 부분에서 자기 결정권이 없다. 문화예술교육은 그런 면에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공평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와 관계 맺기를 경험해 본 사람이 청년, 장년으로 성장한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삶에 대한 인식이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청소년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아직은 학교라는 제도 밖에 위치하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학교 밖 청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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