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명주는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어머니와 함께 옆집 여자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그 여자에게 싫은 소리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는지 얼굴이 굳어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여자는 칠십 대 초반으로 혼자 산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면 치매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 남편이 자기네 빌라에 월세 준 아래층 여자랑 바람이 나서 헤어졌는데 자식들 생각해서 서류상 이혼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현재는 같은 아픔을 겪은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어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지낸단다. 또한 여자는 딸이 근처에서 반찬가게를 해서 늘 재료를 사다 나르고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들을 만들어 준단다. 그래서 어머니 냉장고에는 그 여자가 준 짠지, 고추장아찌, 된장국 등이 들어 있곤 했다. 가끔씩 어머니를 불러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막걸리도 한 잔씩 한다고 했다.
여자는 식탁에 밑반찬들을 깔아놓고 식사를 마치는 중인듯했다. 막걸리 기운에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작다란 키에 통통한 몸매가 다부져 보였다.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베란다 쪽 창문 앞에는 계단식 받침대 위에 난 화분들이 가득했다. 여자는 난 애호가인듯싶다. 화려한 꽃을 피워낸 난 화분에서 주인의 정성이 느껴졌다.
"저희 어머니를 가까이서 잘 챙겨 주신다고 들었어요.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너무 감사드려요." 명주는 선물로 들어온 홍삼 액 세트를 여자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자는 좋은 인상을 풍기며 식탁에 마주 앉았다. 명주 옆에 앉은 어머니도 아주머니가 잘 챙겨줘서 고맙다고 맞장구를 쳤다. 난 화분, 정리된 방에 대한 칭찬을 곁들인 대화 끝에 여기 온 목적을 말했다.
"저희 어머니가 외상을 지셨다는데 갚아드리려고요, 품목이랑 가격을 좀 적어 주시겠어요?"
여자는 싱크대 위에 메모지를 올려놓고 기억을 헤집으면서 중간중간 멈춰가며 적는다. 고심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여자는 대충 적은 것을 다시 일목요연하게 검정 사인펜으로 적어서 명주에게 주었다.
'무 30,000 ₩, 배추 90,000 ₩, 쪽파 30,000 ₩, 고추 10,000 ₩, /총합계 160,000 ₩, / 쪽파 5,000₩, 무 10,000 ₩, 막걸리 6병×1,400=8,400 ₩
모두 합치니 183,400원이다. 거기에 현금 40,000원을 빌리셨다고 한다. 명주는 부풀린게 아닌가 의심이 되었지만 그런 내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십일월 초, 김장철이었다. 이십삼 년도의 물가치고 좀 비싸고 양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배추김치를 담지도 않았고 무 몇 개가 상자에 굴러다니는 것을 보긴 했지만 저 가격 정도로 많아 보이진 않았다.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지만 치매인 어머니의 기억에 의지하여 상대방과 싸우고 따지면 누가 이기겠는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상대방이 부르는 게 값인 상황, 사기를 친다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명주는 자신이 총을 들이대는 사람 앞에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것 같았다. 치매가 가하는 폭력 앞에 굴복하는 꼴이라니...... 그렇지만 옆에서 돌보지도 못하는 처지에 급하거나 연락이 안 될 때는 이 여자에게 전화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머니는 사람들이 김장재료를 사는 걸 보고 자신도 김장이 하고 싶으셨나 보다. 그러고 보니 전에 왔을 때 어머니가 담근 무김치가 통에 가득 담겨 있었다.
"너희도 한 통 갖다 먹어라."
"집에도 많아요. 그리고 식구들이 밖에서 먹고 오는 경우가 많아서 먹을 사람이 없네요."
"배추도 한 통 가져가라."
신문지에 곱게 싸놓은 배추가 있었다. 어머니는 배추랑 무를 썰어서 물김치도 잔뜩 만들어 놓았었다.
명주는 이번만 속는 셈 치고 군말 없이 갚아주고 단호히 못을 박기로 했다. 당장 가져온 현금 이십만 원을 주고 나머지는 계좌로 입금시키겠다고 하며 계좌번호랑 입금액을 써달라고 했다.
계산을 끝내고 명주는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저희 어머니가 기억을 좀 못하는 거 아시죠. 치매가 좀 있으시거든요. 그래서 돈 빌린 것도 기억 못하고 누구한테 샀는지도 몰라요. 먹을 거는 우리가 주말마다 와서 챙겨드리고 해서 식재료도 살 필요가 없거든요. 앞으로는 저희 어머니한테는 물건을 안 파셨으면 해요."
"알죠, 나도 그래서 어머니를 말렸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막 화를 내면서 자기한테는 왜 안 파느냐고 외상으로 달아 놓으라며 고집을 피우시더라고요."
명주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셨구나! 하여튼 다음엔 어머니가 산다고 하시면 절대 못 사게 좀 말려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 그리고 앞으로 저희 어머니랑 돈거래는 절대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어머니가 기억도 못 하시는데 빌려놓고 안 빌렸다고 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때는 못 받으시는 거예요. 돈 때문에 이웃 간에 갈등이 생기면 안되잖아요. 사실 남편이 와서 얘기한다는 걸 제가 말렸어요. 남편이 한 성깔 하거든요." 여자는 남편 얘기에 약간 흠 짓 하는 표정을 지었다. 치매 환자에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물건을 팔고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길 바라며 명주는 남편까지 들먹이며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명주는 여자의 전화번호를 물어 핸드폰에 저장하고 자신의 번호도 알려주었다.
"저희 어머니 항상 옆에서 잘 챙겨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희가 주말마다 오니까 가끔 들릴게요. 앞으로도 잘 좀 부탁드려요."
여자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명주와 어머니는 여자와 인사말을 나누고 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나왔다.
그 후로 어머니는 여자와 적당한 거리를 지내며 지내는 듯했다. 명주는 가끔 어머니 전화기가 꺼져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를 해서 전화기 좀 켜달라고 부탁을 했다. 늘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웃 갈배고는 못 산다."라고 입버릇 처럼 말하는 시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