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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잡는 시어머니

소설 쓰기

by 문이


명주의 시어머니는 여든하나에 치매 판정을 받았다. 초기 치매라 혼자서 살림이 가능하여 아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혼자 산다.


점쟁이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는 걸까, 명주는 시어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어디 가서 점을 봐도 나는 빚을 지고 죽을 팔자란다. 평생 집을 못 갖고 살 팔자라 아파트 하나 산 것도 니 아버지가 홀랑 날려 먹었잖냐."

점쟁이가 한 말을 신의 명령이나 된 듯 굳게 믿어버린 양, 아니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라도 되는 양 어머니는 늘 빚을 지고 사셨다. 돈을 굴리며 사셨다는 표현이 맞을까, 돈을 빌리고 이자를 붙여 갚고를 반복하는 삶. 그녀에게는 돈 빌릴 사람이 많았고 갚을 수 있는 현금도 계속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어머니, 이 고추랑 가지는 어디서 나셨어요? 돈도 없으셨을 텐데."

명주는 냉장고 문을 열고 검정 비닐봉지 다발들을 꺼내었다. 파랗고 싱싱한 풋고추, 찐한 보랏빛 가지들이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 같다.

"경로당에 여자들이 갖고 와서 팔길래 샀지. 너희도 좀 주고 베란다에 말리려고."

"우리 집에도 고추가 있는데...... 돈도 없었는데 무슨 돈으로 샀어요?" 명주가 물었다.

"옆집 여자한테 빌려서 샀지. 자꾸 사라고 하는데 안 사주면 싫어해요."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명주 남편이 잔소리를 한가득 내뱉는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걸 누가 다 먹는다고 필요도 없는걸 이렇게 매번 사요? 그것도 외상으로. 젊었을 때도 빚으로 살더니 그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네. 누구한테 빌린지는 알아요? 그 노인네들도 그렇지 치매 할매한테 외상을 주고 강매를 하네. 하여튼 치매에 걸려서도 이렇게 가오 놀이를 하신다니까."




77122_uploaded_4743194.jpg?type=w966 © Joe Vic Kehr, 출처 OGQ



"이 돈은 뭐예요?"

명주는 어머니의 핸드폰 케이스 지갑에 곱게 접어 놓은 만 원짜리 지폐 두 장과 천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며 물었다.

"옆집 여자한테 빌렸지. 옆집 여자가 반찬도 갖다주고 하는데 고맙지 뭐야. 저 무랑 배추도 그 여자가 팔길래 샀다. 누구든 이웃 갈배고는 못 살아요."


한번은 김치냉장고에 막걸리가 열 병이 넘게 채워져 있었다.

"어머니, 이거 웬 막걸리가 이렇게 많아요?"

"응, 그거 옆집 여자한테 샀지. 그 여자는 저녁마다 밥 먹을 때 막걸리를 마시더라. 소화도 잘되고 변비에도 좋다니 한 잔씩만 마실려고. 많이는 안 마시지. 어제도 그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고 오라 해서 먹고 왔다 야. 사람은 이웃 갈배고는 못 사는 거야."

덕분에 명주는 다음 날 지인들에게 공짜 막걸리를 전하는 착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 어머니! 어머니 심장 수술한 거 기억 안 나요? 심장 안 좋은데 막걸리를 이렇게 쌓아두고 매일 마시면 어떻게 해요. 이거 제가 다 가져갈게요. 그리고 막걸리는 무슨 돈으로 사셨어요?"

"그 여자한테 빌렸지. 연금 나오는 날에 갚는다고 하고."

"얼마를 빌렸는데요?"

"나야 모르지."

어머니는 기억이 안 날 때마다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태연하게 저 말을 던진다. '나야 모르지.' 이 말 한마디로 어머니는 문제 덩어리를 아들 부부에게 토스하고 그들은 고통스럽게 문제를 떠맡는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 부부는 평상시에 어머니 얘기를 할 때면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을 흉내 내며 말을 장난삼아 따라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일을 벌여놓고 저 말을 할 때마다 증오와 절망감이 뒤따르곤 했다.

"엄마, 그 연금은 이 아파트 관리비랑 공과금이랑 엄마가 못 갚은 대출 원금이랑 이자로 다 빠져나가요. 한 푼도 안 남는다고요. 매번 얘기를 해줘도 기억을 못 하고 저렇게 외상을 져놓네. 아니 우리가 먹을 거 다 챙겨주고 돈 들어가는 거 알아서 다 해 주는데 엄마가 무슨 돈 쓸 일이 있다고 자꾸 돈을 빌려요. 얼마 빌렸는지 누구한테 빌렸는지도 모르면서. 그 여자도 왜 자꾸 치매인 거 알면서 돈을 빌려주고 물건을 파느냐고."

다혈질인 그는 당장이라도 찾아가 따질 기세다. 명주도 이 문제를 더 이상 놔두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어머니와 함께 찾아가 잘 말해 보기로 했다.






1497809.jpg?type=w966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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