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았던 나를 다시 만나는 법
나는 기억력이 안 좋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배웠는지, 어떤 날이었는지. 시간이 지나면 휘발된다. 그래서 기록을 해두려고 했다.
문제는 내가 원래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일기 쓰는 것도 싫고, 다이어리에 뭔가 적는 습관도 없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 진입장벽이 높은 사람이다. 거기에 업무에 치인다는 핑계까지 더해서, 기록은 계속 미뤄왔다.
최근 들어 삶에 여백이 생겼다. 예전엔 업무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퇴근이라는 게 조금은 생기는 삶을 살게 됐다. 그러니까 미뤄왔던 숙제가 눈에 들어왔다. 글쓰기.
막상 시작하니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마구잡이로 적어봤다. 그걸 병렬적으로 정리했다. 예쁘게 꾸미는 건 내 표현을 꾸미는 것 같아서 못 하겠고, 그냥 간결하게 메시지 전달 위주로 쓰기 시작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고, 두 번이 어렵지 세 번은 쉽다. 60개쯤 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나만의 문체가 생기니까 빠르게 쓸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음성으로 말하고, AI로 정리하고, 흐름에 맞춰 이어주는 말만 붙인다. 한 편에 15분이면 충분하다. 부담이 없어지니 더 많이 쓰게 되고, 쌓이는 재미가 붙으니 더 재밌어졌다.
그런데 쓰다 보니 이상한 걸 발견했다.
저번 주에 썼던 글을 다시 봤는데, 나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다니 나도 놀랐다. 물론 내가 경험한 거니까 기억은 난다. 그런데 그때의 인사이트는 살짝 무뎌져 있었다. 글을 다시 읽으니까 그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났다. 내 안에서 다시 살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느꼈다. 꽤 괜찮았네.
이게 나한테는 중요하다. 나는 자기효용이 필요한 사람이다. 내가 뭘 해내고 있는지, 잘하고 있는지, 거기서 만족감을 크게 느낀다. 지나간 내 모습들이 괜찮다고 느껴지니까, 지금의 나도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된다. 좋아하는 그 모습들을 자꾸 기억하고 행동하게 되니까, 오늘의 만족감도 조금씩 나아진다.
기록을 보며 결국 내가 괜찮았던 모습들을 다시 새긴다. 그 흔적들을 보면서 조금씩 나아진 나를 확인하는 일. 그러다 보면 그냥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만 같다.
그리고 요즘은 이걸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글과 생각과 경험으로 많이 성장했다. 내 경험이 나에게만 쓰이는 것도 좋지만, 정말 필요한 누군가가 이걸 가져가서 더 좋은 결과를 맛본다면 그것도 뿌듯할 것 같다.
내 톱니바퀴가 누군가의 톱니바퀴와 맞물려서 더 크게 굴러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그런 영향력을 갖고 싶다. 그게 진짜 유의미하고 긍정적이면 좋겠다.
이 글쓰기가 남을 위한 것 같지만, 어쩌면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쓴다.